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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도화 Oct 15. 2023

불과 해진 얼굴, 아부성 찬양, 은근한 자기 자랑

#12

 모든 공무원은 승진을 원한다. 승진에 관심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일수록 마음속으로는 더 강하게 승진을 원한다. 공무원들은 왜 승진을 바랄까. 권력? 명예? 돈? 모두 그럴듯하지만 조금씩은 모자라고 추상적인 설명이다. 권력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하위직에서도 승진의 희구는 유효하며, 특정 직급의 경우 승진을 하면 야근 수당이 없어져 오히려 월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공무원은 가족과의 오붓한 저녁 식사보다 상사가 은근슬쩍 눈치를 준 회식을 우선한단 말인가. 게다가 정년까지 신분보장이 되어 있는데.


 진오가 깨달은 답은 다음과 같았다. 실무자가 관리자로 탈바꿈하는 전과정인 공직사회의 승진은, 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동시에 편해진다. 일단, 관리자는 실무자보다 시간이 많다. 실무자가 한나절이나 걸려 쓴 보고서도 관리자가 읽고 이해하는 데는 길어야 5분이면 족하다. 물론 이해하는 척하는 시간이지만, 하여간 할애하는 시간만 따지면 그렇다. 게다가 관리자는 실무자의 고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먼저 파도를 맞는 사람이 실무자라면, 그 뒤에 숨어 ‘네가 파도를 좀 잘 막았으면 여기까지 물이 튀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핀잔을 늘어놓는 사람이 관리자다. 이러한 기본적 속성에 더해 관리자가 특히 무능하며,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아무것이나 트집을 잡는 성격이라면? 끔찍한 일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게다가 공직사회에서는 직급이 올라 갈수록 책임도 작아진다.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도 많아지는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어떤 문제가 생긴다. 문서를 기안하고 직접 실행한 실무자는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시켜서 했다고 주장한들, 어쨌든 누군가 강제로 문서를 만들게 하진 않았을 테니 실무자 본인이 이런저런 책임에서 빠져나갈 구멍은 별로 없다. 하지만 관리자는 다르다. 


 ‘지시한 기억이 없다. 전결 사항이라 몰랐다. 실무자가 오해한 것 같다.’ 


 책임을 회피할 길은 무궁무진하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그 틈은 더 벌어진다. 그러니 공직사회에서 승진은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높고 빠를수록 좋다.


 정 과장과 김 국장의 사이는 원래부터 썩 좋지 못했다. 정 과장은 김 국장이 신중한 성격 뒤에 숨어 자리에 맞는 마땅한 결정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며 비난했고, 김 국장은 정 과장이 조직에서 좀 잘 나간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그들은 서로를 무시했다. 기수와 나이를 고려했을 때 김 국장이 실장급으로 승진할 확률은 터무니없이 적었기 때문에, 정 과장 입장에선 조만간 자신이 국장급으로 승진하면 더 이상 그를 상사로 모실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김 국장은 정 과장을 일종의 육두품 취급했다. 정 과장은 십여 년 전, 부처 통폐합 때 들어온 타부처 출신이기 때문에 직계 후배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런 정 과장이 에이스로 잘나가고 있으니, 김 국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직 문화가 지나치게 말랑하다며 개탄했다. 


 그들의 불화로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건 실무자들이었다. 서로 다른 지시를 할 경우 누구의 지시를 따를지 고민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이견을 줄여보고자 보고 자료를 몇 번이나 수정해야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김 국장과 정 과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도 사무관은 확실하게 김 국장 편을 들었다. 둘 사이의 이견이 있을 경우 김 국장의 지시를 따랐고, 때때로 정 과장을 건너뛰고 김 국장에게 먼저 보고를 하여 의사결정을 쉽게 이끌어냈다. 정 과장이 미래의 권력이라면 김 국장은 현재의 권력이었고, 도 사무관의 베팅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녀의 논리는 명쾌했다. 어차피 중요한 보고는 국장이 장관에게 하기 때문에 과장과 국장 사이를 양자택일하라면 국장의 말을 따르고, 대신 실무자의 의견을 그에게 정확히 인풋 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그녀는 일이 되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때문에 자신에게 붙는 이런저런 평판은 중요치 않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월요일 오후만 되면 김 국장의 방 앞에는 대면 보고를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월요일 간부 회의를 제외하면 그는 서울에서 거의 모든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 간 세종에 내려온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하려는 수요는 그래서 같은 시간에 몰렸고, 하다못해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려는 직원들로 하루 종일 그의 방 앞은 북새통이었다. 


 “국장님 점심 드시고 들어오시다가 체하시겠네.”


 국장실의 비서 정 주무관은 점심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앞에 줄을 선 네댓 명의 사람들을 보며 영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식사들은 하셨어요, 천천히들 오시지.”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김 국장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긴 줄이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를 보자 직원들은 단체로 목례를 했다. 진오 역시 보고서 몇 장을 든 채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간단한 보고였지만 오타는 없는지 눈으로 계속 검수했다. 방 안의 분위기는 대체로 좋아 보였다. 김 국장의 인자한 목소리와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오늘 오후에 국장님 세종 계시죠?” 


 차례가 되어 드디어 비서 자리까지 오게 되자, 진오가 정 주무관에게 친한 척을 하며 물었다. 


 “조금 있다 올라가셔야 해요. 오송역에서 2시 반 기차 타고요.”


 그녀는 고개도 들지도 않은 채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인트라넷에는 아무 일정도 없던데요? 무슨 일정 생기셨어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표 끊어달라고 해서 끊어 드렸어요.”


 수직적인 문화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공직 사회에서 비서는 직급을 벗어난 존재였다. 그 누구도 비서들끼리의 복도통신을 무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무리 깐깐한 간부라고 하더라도 비서에게만큼은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하물며 일반 직원들에게 비서는 단순히 직급으로 누를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였다. 


 “이 사무관, 급하니까 양보 좀 해 줘. 미안.”


 어디선가 달려온 도 사무관이 진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새치기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양해는 애초에 필요 없어 보이는 제스처였다.


 “또 저러는구먼.”


 정 주무관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진오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정 주무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원래 새치기 잘 해요?”


 “기다리기 싫어서 저러는 거예요. 아까 국장님 일정까지 다 확인하고 갔어요.”


 ‘아차’하며 진오가 시계를 보는데 보고를 끝낸 도 사무관이 의기양양하게 방에서 나왔다. 다음 차례로 진오가 들어가자 김 국장은 양복 재킷을 걸치며 나갈 채비를 했다. 


 “국회 때문에 서울 가야 하니까, 급한 거 아니면 카톡으로 넣어.”


 진오가 아쉬운 마음에 복도까지 김 국장을 따라 나가며 물었다.


 “혹시 오송역에 어떻게 가십니까? 제 차로 모셔다드릴까요?”


 “청사 정문에서 버스 타면 금방이야. 그리고 이 사무관, 요즘 직원들 차 얻어 타면 난리 나는 거 몰라?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니야. 얼른 가서 일이나 해. 요즘 정 과장이 일 안 시켜?”


 김 국장이 쌩하게 걸음을 앞서 나갔다. 진오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고개를 숙여 크게 인사를 했다. 손에 쥔 보고서는 축축한 땀 때문인지 눅진했다. 나중에라도 보고하려면 다시 출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종이를 넘기는데 그제서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타가 보였다. 


 며칠 후 김 국장이 저녁 번개를 쳤다. 멤버는 진오와 도 사무관, 그리고 허 주무관이었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본인에 의하면 평소 좋아하는 직원들로 모았다고 했다. 역시 정 과장은 없었다. 


 “위하여” 


 김 국장의 건배사 아래, 무엇을 위하는지도 모른 채 아랫사람들은 구호를 외쳤다. 소맥 폭탄이 몇 순배 돌았다. 그 이후는 뻔했다. 불콰 해진 얼굴, 아부성 찬양, 은근한 자기 자랑, 고민 상담을 빙자한 세평 수집. 진오는 진절머리가 났다.


 진오가 비서에게 미리 확인한 바로 김 국장은 9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를 끊었다. 고로, 2차까지 이어질 자리는 아니었다. 오늘은 연이의 얼굴을 보고 잘 수 있을까 기대하며 진오는 잔을 꺾었다. 그때였다. 도 사무관이 목소리 톤을 높여 호들갑을 떨었다.


 “국장님, 이번에 이 사무관하고 처음 근무하는데 성실하고 일도 잘 하더라고요.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주무 사무관을 데리고 오셨어요. 사람 보는 눈도 참 좋으세요.”


 “이 사무관님이야 제가 오래 봐서 잘 알죠. 어디 가도 제 역할을 할 인재입니다.”


 허 주무관이 보조를 맞췄다. 김 국장은 말없이 허허 웃기만 했다. 


 “이 사무관이 정 과장님 보좌를 얼마나 잘 하는지, 과장님이 이 사무관 보고는 듣지도 않고 패스에요.” 


 도 사무관의 입에서 정 과장이란 단어가 나오자 김 국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 사무관의 말에 장단을 맞추던 허 주무관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질 찰나, 날아온 칼날에 베이느니 칼등이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진오가 쩌렁쩌렁 말했다. 


 “국장님이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 국장은 자신의 소주잔을 비우고 진오에게 건넸다. 진오가 잔을 받으며 무릎을 굽히려 하자 김 국장은 편하게 받으라며 그의 어깨를 누르고는 9부 가득 소주를 따랐다. 소주잔 안에 고춧가루를 보면서도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돌려 급히 잔을 비웠다. 휴지를 한 장 뽑아 잔을 슥슥 닦고는 다시 김 국장에게 내밀었다. 소주는 7부만 따랐다. 김 국장은 입에 잔을 살짝 대기만 하고 진오의 어깨에 한 쪽 손을 올렸다.


 “이 사무관, 잘 하고 있어. 다만 어디 가서 누구 라인이네, 누구 사람이네 이런 이야기는 안 듣고 다니는 게 좋아. 잘 나갈 땐 그게 힘인 것 같아도 나중에는 다 독이 되거든. 우리는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결국엔 다 알아준다고.”


 “국장님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후배에 대한 사랑이 따뜻하십니다.”


 눈치만 보던 허 주무관이 급하게 맞장구를 쳤다. 자리는 진오의 예상대로 1차에서 파했다. 계산은 김 국장이 했다. 업추비 카드가 아닌 개인 카드였다. 진오는 허 주무관에게 업추비 카드로 다시 결제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국장님 강남에만 집이 2채예요. 걱정 마세요.”


 허 주무관이 웃으며 답했다. 청사 근처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모시겠다는 진오의 말에, 김 국장은 자신은 그렇게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라며 제발 좀 그냥 집에 가라고 타박했다. 머쓱해진 진오는 모두를 보내고 대리기사를 불렀다. 청사에서 식당까지 김 국장을 모시느라 차를 가져온 터였다. 


 대리기사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진오는 술을 좀 깰 겸 편의점을 찾았다. 대로변에선 보이지 않아 이면 도로로 나가기 위해 상가 복도 건물을 관통했다. 중간쯤 왔을 무렵, 진행 방향의 오른쪽으로 어두운 공실 앞에 인기척이 있었다. 화장실 반대편 복도라서 늦은 시간에는 불을 꺼 두는 모양이었다. 진오는 무심코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인기척의 실루엣은 다름 아닌, 김 국장과 도 사무관이었다. 그들은 껴안은 채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누가 훔쳐보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진오는 반사적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자신의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고요가 찾아왔다. 그들은 복도의 다른 끝을 통해 이면 도로로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진오는 재밌는 가십을 알게 되었다는 흥분감과 누군가의 사생활을 의도치 않게 들춰 봤다는 두려움이 뒤 섞인 채로 대리기사가 올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을밤공기에 제법 한기가 스몄는지 몸이 조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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