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00 | 육상선수 중학생이 외고 고등학생이 되면 겪는 일
안녕하세요, 'G' 중학교에서 온 '민오즈'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육상을 시작하여 멀리뛰기를 시작으로 세단뛰기, 릴레이 종목에 참가했습니다.
세단뛰기의 홉, 스텝, 점프 단계 사진을 빔 프로젝터로 보여주면서 흥분해있던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화면으로부터 관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아주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했다. 그렇다, 여기는 체육고등학교가 아닌 외국어고등학교다.
초등학교 6학년. 단순히 오십 미터 달리기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시도 육상대회에 출전했던 나는 14살이 되자 여느 대한민국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집 근처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제는 육상대회에 안 나갈 것이라는 부모님의 예상은 중학교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무너지면서 나는 점차 본격적으로 육상의 길로 나아갔다. 매일 아침 한 시간 일찍 등교하여 친구들이 등교하는 순간까지도 운동장 위에서 쉬지 않고 달리고만 있었다. 사실 공부에 그리 흥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나는 쉬는 시간마저도 '경찰과 도둑' 게임을 하며 육상부 친구들과 복도에서 쉬지 않고 질주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침 훈련보다 '경찰과 도둑'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시도 대회에서 8개의 메달을 받았고 여자 중학교 전체 3위 트로피까지 받아쥐었다.
중학교 3학년. 복도를 질주하던 나를 2년간 혼내다가 결국 아침 조깅 메이트가 된 교장선생님께서 나에게 체육고등학교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같이 운동하던 친구 몇 명이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나 또한 당연하게 그 길에 동행할 것을 모두가 당연시했다. 부모님 빼고.
여기서 또 한 단어가 나온다. '서울'. 신생 학교였던 이 체육고등학교는 당시 대입 결과가 불확실하여 '서울'권 대학 입시가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다른 건 안 바라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를 원하셨다. 16살 나는 부모님 말씀이 곧 정답이라며 달리기 속도처럼 빠르고, 세단뛰기 도약판을 디딜 때처럼 가볍게 체고 입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다른 학업 성적보다 영어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서울'권 대학에 많이 보낸다는 지역 외고에 지원, 이유 모를 자신감 하나로 합격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다들 외교관, 법조인이 되겠다는 발표의 바닷속에서 해맑은 아이 하나가 자신은 '서울'권 대학에 있는 체육학과에 진학하여 스포츠 기록 분석 연구원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담임 선생님의 얼굴에는 황당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기억하기로는 내 열띤 발표에도 추가 질문도 없었다. 발표 끝에 남은 건 발표에 흥분해서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뿐이었다.
그리고 고작 몇 개월 뒤. '경찰과 도둑'은커녕 '경찰관의 인권과 도둑의 인권 중 어느 것을 우선할 수 있는가'와 같은 토론 주제로 머리를 쥐어뜯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고작 1년 만에 복도를 질주하기는커녕 카페인 없이는 제대로 직립보행조차 못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육상선수로서의 추억이 아닌 '그때 운동 말고 영어 단어 백개씩만 아침에 외웠다면 영어 공부 시간을 조금 줄일 수 있었을 텐데'와 같은 공교육의 노예와 같은 생각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연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적어도 3년, 길면 9년을 살다온 친구들이 가득한 학교 안에서 중등 영어 마스터는 원문을 이해하기보다 암기하는데 급급했다. 그러니 효율이 떨어진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다른 과목을 공부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1년 사이. 어떠한 부상에도 절망하지 않던 나는 하루 16시간 공부에도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하자 '사실 세상이 절망 덩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의 추종자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작년에 내신 5등급 이하 선배들은 '서울'권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는, 출처 없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나의 생활기록부를 보며 웃음 짓는 나의 잔혹함에 소름이 돋는다. 3학년 2학기 초, 스트레스로 일시적 마비 현상이 오면서 앞으로 운동을 하지 못할 거라며, 의사 자신의 소견으로는 운동을 아예 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구나.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진로를 스포츠 기록 분석 연구원에서 사회과학연구원으로 전환한 지 대략 2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우울증이 시작된 건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행복함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의 모습에 성적이 상승 그래프 속 한 점씩 찍힐수록 두려워하셨다. 이제는 카페인을 아무리 마셔도 직립보행마저 되지 않았다. 이따금씩 잘 걷기도, 뛸 수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복도에 설치된 펜스를 짚으며 복도를 다녔고, 그 와중에도 전교 임원 활동을 하러 쉴틈도 없이 다리를 끌고 다녔다.
서울은 멋져야만 한다. 다 포기한 나를 위해서라도 (그놈의) 서울은 행복해야 한다. 다리 통증도, 한 시간 뒤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도 다 잊을 만큼 눈부셔야 한다. 그 다짐으로 나는 닭장만큼 좁은 칸막이 학습실을 떠나 번잡하고 보온조차 안 되는 출입구 앞 복도 책상에 다리를 피고 앉아 수능 공부를 했다.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면서 공부했고, 그렇게 대입을 이루었다.
수능이 끝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축하할 겨를도 없이 하루에 20시간을 자며 서울로 떠날 순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