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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27. 2024

아랍 해방의 불꽃, 아도니스 <너의 낯섦은 나의 낯섦>


 20세기 초반까지 아랍시들은 고전 아랍시 까시다의 영향 아래 있었다. 정형시로 모든 행에 각운을 사용하는 까시다는 이슬람 이전 시기인 4,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아랍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현대 아랍시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인 아도니스, 본명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는 기존 까시다의 영향을 받은 아랍 문학에 도전하는 선구적 시인이다. 형식적으로는 기존 까시다의 까다로운 운율과 형식을 파괴하고 자유시인 신시 운동을 주도했으며, 내용적으로는 인간의 궁극적 해방의 염원을 시에 담았다. 안타깝게도 번역된 시의 한계로 인해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의 시를 읽을 수는 없겠지만, 형식적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그의 풍요로운 시 세계는 충분히 아름답다. 아도니스 시인의 시선집 <너의 낯섦은 나의 낯섦은>은 평생동안 쓰여진 그의 시들을 선별한 시집으로, 번역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1.아레스와 아도니스

필명 아도니스는 고대 신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중 가장 알려진 인물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아도니스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은 미소년이었다. 아도니스는 바빌로니아의 풍요의 신인 탐무즈의 변형으로 추정되는데, 해설에 따르면 생명력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을 딴 아도니스는 풍요와 소생, 부활의 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아도니스의 죽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자, 그녀를 연모하던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살해당했다. 아프로디테는 큰 슬픔에 빠졌고, 저승에 간 아도니스는 저승의 여왕 페르세포네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이 사실을 안 아프로디테는 저승에 찾아가 아도니스를 부활시켜달라고 했고, 결국 중재를 통해 반년은 지상에서, 반년은 저승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설화를 시인 아도니스에게 적용한다면 꾀나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아랍이라는 지역에서 평화롭게 각자의 멋을 가지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랍 민중들이 19세기,20세기 들어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전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아레스에게 죽음을 맞이한 아도니스를 볼 때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일으킨 중동전쟁으로 황폐화되는 아랍 세계, 특히 팔레스타인과 인근 국가들이 떠오르며, 아도니스의 죽음은 곧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민중의 죽음으로 읽힌다. 아도니스는 결국 죽었지만, 아프로디테의 사랑의 힘으로 다시 부활한다. 이는 현재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들이 독재 및 제국주의 이해관계로 고통 받고 있지만, 아도니스처럼 사랑의 힘으로 부활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2.애증의 존재인 신, 그리고 시인의 임무

시인 아도니스의 시에는 이러한 아랍 민중의 부활, 달리 말하면 아랍 민중의 궁긍적인 해방을 염원한다. 그래서 강력하게 부활을 염원과 미래지향적이며, 특히 불이라는 소재가 시에 자주 등장한다. 이 불의 이미지는 각기 상이하나, 바슐라륵가 언급한 극단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에 가깝다. 해설에 따르면, 시에 영향을 준 사상으로 이슬람 신비주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 니체 사상을 꼽았다.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여 궁극적인 해방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극단적으로 살아있고, 무엇보다 강력하게 희망의 소망한다.


불에 그을린 나무 가면을 써다오

불과 신비의 바벨이여.

나는 훗날 오실 신을 기다리니

화염의 옷을걸치고

바바의 폐에서, 석화에서 훔쳐 온

진주로 치장하신 그분을

나는곤혹스러운 신을 기다리니

분노하고 통곡하고 고개 숙이고 빛을 발하는 그분을.

미흐야르여

그대의 얼굴은

훗날 오실 신을  예고한다오.   


-예견 전문


미흐야르는 1000여년 전 시인으로, 당시 선진적인 시들을 많이 썻다는 측면에서 아도니스와 비슷하다고 한다. 아도니스는 미흐야르를  호명함으로써 스스로 시인의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데, 시인의 얼굴-시에서 훗날 도래할 신을  예고하라는 것이다. 즉, 시인은 보이지 않지만 억압으로부터 궁긍적 해방을 시켜줄 신을 목격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신의 모습은 불의 이미지이다. 화염의 옷을 걸친 시인은, 분노하고 통곡하고 고개 숙이고 빛을 발할 정도로 장엄한 파괴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불의 이미지는 아랍을 억압하는 주체들에 대한 분노로, 화염으로 파멸시켜하고 싶은 욕망이 느껴진다. 그가 진보적인 정치활동을 하며, 여러 정치적 피난을 한 그의 생애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급진적인 욕망을 신의 초월적 힘으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한 것이 시에 담겨있다. 그래서 유대 신비주의 신앙처럼, 폐허로 된 지상에서 구원을 바라는 메시아주의와 유사하며, 시인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신을 목격하는 견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에 대한 이미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초월적 힘을 발휘할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오지 않는 신은 원망의 대상이며 이는 시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죽음> , <어느 신이 죽었다>에서 나타난다. 특히 아도니스에게 신은 이슬람 세계의 신성불가침한 절대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세계의 다신론등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즉, 신에 대한 기대가 있음에도 한편으로 오지 않는 신을 미워하며 강력하게 아랍 민중의 해방을 염원한다. 그래서 신이 내린 부조리와 맞서는 투사로서 시시포스와 함께 한다고 말한다.


나는 물 위에 글을 쓰기로 맹세했다.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짊어지기로 맹세했다

그의 육중한 바위를.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시시포스에게' 중


시인 아도니스는 시시포스와 함께 하기로 맹세한다. 이것은 부조리라는 존재론적 고통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시인의 방법으로서 맞선다는 것이다. 시시포스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선진적 아랍민중으로 읽힌다. 거대한 서방 세력이 아랍 민중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 고통은 너무나 중엄해 극복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은 시시포스가 정상에 바위를 올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시인은 강력하게 맹세한다. 시시포스와 함께 하기로, 실존적 고통을 겪는 아랍 민중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기로 맹세한다. 시인은 견자인 동시에, 민중에게 형제애와 동지애를 느낀다. 그런한 인본주의적 사랑은 시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불의 성질, 바슐라르가 말한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로 보인다.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시인은 강박적으로 민중들에게 불-지식을 나눠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아도니스는 끔찍하게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란 강박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런 강박의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3.서구 문명에 대한 분노

 탈식민주의 비평 이론의 대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도니스를 두고 아랍 시 세계의 T/S 엘리엇과 비견된다고 한다. 최초의 모더니즘 시라 할 수 있는  <황무지>를 쓴 엘리엇처럼, 아도니스는 까시다의 고전 아랍 시 전통에 작별을 고하며, 아랍 시 세게에 모더니즘을 도입했다. 엘리엇이 4월은 죽은 달이라며 낙관적인 기술 문명에 대한 종언을 선언하고, 황폐화된 정신적 상황과 비인간성을 고발했다면 아도니스는 <뉴욕을 위한 무덤>이라는 시에서 감정이 과잉될 정도로 깊은 분노를 통해 서구 문명을 비판한다.


뉴욕

한 여인-여인의 조상

한 손으로 그녀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문서가 자유라고 일켤은 넝마 쪼가리를 치켜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구라는 이름의 여자아이 목을 조르고 있다.


뉴욕

아스팔트 색의 육체. 그녀의 허리에는  축축하게 젖은 허리띠가 둘려 있고

그녀의 얼굴은 닫힌 창문이다.

나는 말했다: 월트 휘트먼이 그것을 열 것이다.    


-'뉴욕을 위한 무덤' 중


시인에게 뉴욕은 악의 축의 근원이다.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도시는 반대로 가장 야만적이고, 모든 악이 총동원된 곳이다. 그의 시에서 뉴욕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만났지만, 조화롭게 어울러지기 보다 괴로운 곳이다. 시인은 혁명을 이야기한다.


너의 임박한 혁명은 언제 있을 것인가? 내 목소리가 커진다: 링컨을 대리석의 흰색으로부터, 닉슨으로부터, 경비견들과 사냥개들로부터 해방시켜라. 그로 하여금 새로운 눈으로 흑인들의 지도자 알리 이븐 무하마드를 읽게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과 마오쩌둥이 읽었던 지평선을 읽도록 내버려 두어라


-'뉴욕을 위한 무덤' 중


 시인은 소망한다. 뉴욕에서 금지된 것을, 그래서 혁명가들이 보았던 지평선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적이다 못해 반동적인 T/S엘리엇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뉴욕으로 대표되는 서방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이를 전복시키고자 소망한다. 그것은 시인이 오래전부터 바라던 아랍 민중의 궁극적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진보적 모더니즘은 아랍 민중에 대한 사랑과, 이들을 억압하는 주체들에 대한 강력한 분노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이다.


 정리하자면, 아도니스는 선구적인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에 의해 강박증에 시달리면서도, 시시포스로 대표되는 아랍 민중-모든 억압받는 이들에게 형제애를 보여준다. 그의 언어는 아랍 전역과 고대 희랍, 뉴욕을 비롯한 광범위한 공간을 포괄하고 있으며, 성경, 그리스 신화, 메시아주의, 이슬람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적 사상을 다루면서도 신화적 세계관에 잡아먹히지 않고 인류의 궁긍적 해방을 염원한다. 그 과정에서 시인으로서는 견자로 시를 쓰되, 민중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며 맹세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아름다운 불의 세계이며, "불의 얼굴과 시의 얼굴이-하나의 길이라고."(길의 시작2)를 말하고 있다. 그 불은 아랍 전역에 해방을 가져올 희망의 불꽃이며, 시인은 그 불꽃을 전력을 다해 담아내고 있다.


202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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