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치료 141일
나의 공황장애 동생은 전반적으로 삶을 돌아봤을 때 , 후회하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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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반대로 우울증에 걸린 나는 생각보다 더 자주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고 후회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건 습관적인 것일까? 아님 우울증으로 인한 병적인 증상인 걸까. 이런 비합리적인 사고의 과정 때문에 나는 우울증이 생겨버린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이런 비정상적인 사고의 과정을 끊어내야 하는데 나는 오늘도 과거의 일들에 얼쩡거린다.
나는 문과에서 교차지원으로 간호학과에 입학 했다. 학교는 인천에 있었고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6시간이 걸렸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서 거의 끝에서 끝을 지하철을 타고 횡단했다. 보통 나는 여행을 했다고 이야기했었다. 친구들도 이 정도면 배를 타고 출근하는게 어떠냐며? 이야기 했었다. 그러니 적응은 둘째치고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벅차고도 큰 숙제와 같았다. 자취를 하고 싶어도 버스와 지하철이 다 연결되기때문에 혼자 원룸살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부모님의 적극적인 통학권유로 1년간 매일 6시간이 걸려 학교와 집을 오고 갔다. 월요일 첫 강의시간은 9시였는데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 간호학과만 시간표가 정해져서 나왔다) 그 과목은 지각이 너무 잦아서 C를 받았고 , 계절학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더불어 간호학과 공부는 따라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과 과목 극혐자로서 이게 머선 말이고?_? 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았고 , 통학의 여파로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라는 변명을 해봅니다) 결국 나는 100명 중에 91등을 했고 , 2학년 때부터는 학교 근처 원룸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건 나의 빅픽쳐였을까? ㅋㅋ
다행스럽게도 3학년 때부터는 어느 정도 공부를 따라잡아서 종종 성적장학금도 받고 그랬다. 특히나 재밌었던 분야는 정신간호학과 성인 간호학이었다. 성인 간호학은 병의 원인을 거꾸로 파헤쳐 나가는 것이 참 재밌었다. 각 단계마다의 치료법이 다른 것이 흥미로웠고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해서 좋았다. 정신간호학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광활한 정신세계가 신비로웠다. 어린 시절이 성인에게 지대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이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울한 나를 알아차리진 못했을까? 이게 늘 의문스럽다) 이 두 과목은 늘 내게 효자 과목이었다. 언제나 A+ 후후후.
우리 학교는 2학년 2학기 때 실습에 발을 담구었다. 말 그대로 발만 담궜다. 진짜 시작은 3학년 1학기부터 였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며 실습을 하고 실습 후 케이스 스터디를 준비하며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이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 3학년 2학기 첫날부터 실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수술방 실습이 배정되었는데 첫날 나가자마자 자궁절제술에 참여하게 되었다. 비릿한 냄새와 자극적인(?) 수술 장면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결국 기절을 했다. 정신이 들어 눈을 살포시 뜨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아 여기 회복실이구나.’ 기절을 하면서 석션 통을 건드리게 되어 교수님이 “저 학생 내보내!!!”라고 버럭 하셨던 것과 그 뒤로 질질끌려가다가 한번 더 이마가 아팠던 기억만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나는 두 번 쓰러졌다고 했다. 같은 부분을 부딪치면서 이마에 혹이 주먹만 하게 올라왔다. 조퇴는 안된다고 해서 어질거리는 머리로 신경을 바싹 세우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는 오후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가서 긴장이 풀리며 지금껏 참아왔던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버거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휴학을 하겠노라고. 지금 생각하면 어쨌든 여기는 고등학교도 아니고 나는 성인이라 과사에 가서 휴학 신청서를 내면 되는 거였는데 엄마의 허락을 구하고 설득을 이어갔다.. 나 죽을 것 같다고. 너무 힘들다고. 스물이 넘어 엉엉 울었다. 엄마는 주변 간호사분들과 병원에 있던 분들께 자문(?)을 구하고는 절대 휴학을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 졸업하고 들은 이야기이지만 내가 휴학을 하면 다시는 간호학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밤새도록 울었다. 퉁퉁 부운 눈을 하고 실습을 나갔고 , 간호사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안 해왔단 이유로 또 한바탕 엄청 혼났다. 사실 숙제고 실습이고 나발이고 어찌 되었던 건 그때는 다 상관없었던 것 같았다. 그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지금 돌아보건대 아마 난 그때 경도 우울증을 겪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중증도로 넘어가지 않은 건 다행히 방학과 주말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정말 더 이상했던 건 병원에 취직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종합병원 내과병동에 배정되었고 3교대를 하게 되었다. 성인간호학을 좋아했었는데 다행이다 싶었으나 이론과 현실은 괴리가 있어 공부를 다시해야했다. 더불어 다행히 선생님들 또한 너무 좋으셨다. 따돌림 , 그러니까 태움도 없었고 생각보다 일머리가 좋았던 나는 금세 적응을 했다. 1년 차 치고 일 잘하네? 2년 차 치고 일 잘하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월급으로 백화점 플렉스도 해봤고 학자금도 갚아 나아가갔다.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 처음 간호사를 시작할 때 , 다들 힘들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정도의 힘듦을 겪어내는 줄 알았다. 그래서 참아냈다. 다들 그러는 줄 알고. 유난 떠는 것 같아 참고 참아냈다.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면서는 버스가 뒤집혀 사고라도 났음 했고 , 걸어서 가는 날엔 돌부리에 넘어져 반깁스를 했으면 했다. 잠이 들면서 아침이 오지 않았음 했고 출근을 하면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갔다. 아무리 긴 휴가를 받았어도 온전히 즐거울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출근할 날이 머지않았으니까. 매일 잠들면서 눈물범벅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가 언제나 날 압도했다. 생글생글 웃고 나긋하게 설명을 하는 친절한 간호사였지만 그때의 나는 출근과 동시에 모든 감각을 바싹 세워 일을 해냈다. 뭐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살았냐?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 그게 내가 생존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간호사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센스 있게 일도 잘하고 1인분의 역할도 충분히 해내며 어이없는 의료사고를 내지 않는 막내가 되고 싶었고 , 의사들에겐 무시당하지 않는 간호사가 되고 싶어 처절하게 공부했다. 환자와 보호자들에겐 안 그래도 힘드신 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다정하고 전문적인 간호사가 되려고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를 다그쳤다.
아마 이때도 경도의 우울증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을 했으니 중증도 이려나? 무력하고 즐거움이 사라진 날들이 많았으니 어쩌면 약물치료가 필요한 단계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병원을 향하지 않았던 건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캐치하지 못했고 그저 간호사의 힘듦 정도라고 생각을 했다. 더불어 안 그래도 심했던 생리통이 3교대 하면서 더욱 극에 치달았고 내가 진통제 주사를 맞고 환자를 돌본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기도 했으며 , 코이카에 지원했던 것에 합격하여 결국 사직을 했다. (몽골 간호사로 합격을 했지만 결국 출국은 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로) 그렇게 나는 퇴사 후 죽은 듯 몇 달을 보냈다. 좀 살만해져서 집 근처 보건소의 계약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트레스 없는 직업군이 어디 있으랴. 중증도는 낮아지고 내게 원하는 업무의 기대치가 현저히 낮아졌지만 작은 스트레스들만으로도 내 우울감은 깊어지기 충분했다. 이미 멘탈이 어긋나고 있었다.
혹시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
혹시 내가 간호사를 할 때 ,
병원을 찾았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아마 쉬이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을 것 같다.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인데.. 이 불안정한 인간이 한 가족을 꾸려낸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니까. 우울증 와이프와 우울증 엄마는 내가 생각해도 좀 별로니까?
그렇다면 대학교 3학년 때 병원을 가는 게 아니라 휴학을 했으면 어땠을까? 또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얼마 전 읽었던 자존감 수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는 사랑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포장과 과장을 반복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은 더 황폐해진다. 차츰 이렇게 자기 확신이 줄어들면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당연히 괜찮은 사람은 나를 사랑할 리 없다고 확신하고 그래서 누가 봐도 부족한 사람의 사랑을 덜컥 받아들인다.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나는 사랑스러운 존재야. 그래서 누가 나를 사랑하는 건 자연스러워'라는 전제가 있다. 이 느낌은 사랑을 유지하는 중요한 보호막이 된다. 반면 자신의 매력과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사랑도 어렵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의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예컨대 “왜 이렇게 늦었어?”라는 말에는 시간을 안 지켰다는 질책만이 아닌 ‘내가 가치 없는 존재니까 약속을 어기는 거야'라는 의미까지 숨어 있다. ‘사랑에 취했을 땐 그러지 않더니 내 정체를 알아버려서 사랑이 식은 거지'라는 불신도 섞여 있다.
<자존감수업 / 윤홍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입장에서 구남친에 대해 언급하는 게 좀 거시기 하기는 하지만 , 우울증이 어쩌면 자존감의 부재에서 올 수 있다고 해서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을 읽다가 저런 구절을 발견해버린 것이다. 나의 사랑은 쉽게 시작되었으나 늘 어려웠다. 다툼이 싫어 이해해주려고 노력을 했고 , 그들을 다정히 챙겨줌으로써 타인에게서 나의 존재 이유를 찾아냈다. 누군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날 좋아해 줘서 고맙다며. 날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여러 번의 연애를 거쳐 제법 성숙한 연애를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지금의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날 살뜰히 챙겨주는 게 좋았고 그의 듬직함에 내가 기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 안에 어린 내가 (내면 아이) 아빠에게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그에게서 채워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여전히 듬직하고 다정하며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눈이 뒤집혀(?) 그 일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그러니 성숙한 연애라기보단 내면 아이가 나와 잘 맞는 신랑을 골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여러 과거의 날들에 바로 잡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면 , 나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자립적이고 또 독립적인 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이상하게 굴었던 날들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과거의 나 또한 아팠구나. 죄책감은 그만 느끼고 싶은데 , 우울감이 수놓은 아침을 종종 마주할 때마다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가족을 꾸려서는 안 되었던 걸까? 사실 이런 걸 생각하는 것마저 웃긴 일 아닌가?ㅋㅋ
이미 나는 가정을 꾸렸고 내겐 토끼 같은 아이들이 있고 , 듬직한 신랑이 있다.
자꾸만 잊는다.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자유롭고 싶은데 오늘도 그만 과거에서 헤엄쳐버렸다. 하지만 희한스러운 것은 어렸을 때는 아예 기억이 나지를 않고 중학교 때 까지는 드문드문 기억이 있고 대부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등학교 때도 큰 사건들만 큼지막하게 기억나고. 병원 선생님에게 물으니 아마 내가 살아내려고 과거의 기억을 잊은 것 같다고 하셨다. 정말 이상하다. 과거의 기억이 없으면서도 , 계속해서 과거를 후회하니 이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
그러니 오늘을 살아내자. 볕이 좋고 나무는 싱그럽고 나의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커피는 맛있고 전기자전거는 재밌다. 어제부터 읽는 책은 내 마음밭에 도움이 무척이나 많이 된다. 그러니 난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당신도 ,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