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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an민산 Oct 22. 2022

사람에게 해로운 건 눈에 띄기 마련이야

- 열무김치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나는 늘 분주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루 종일 있었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쫑알거리던 종달새였다.  아직 언니 오빠는 귀가하기 전이었고 동생은 늘 동네 어딘가를 뛰어놀고 있을 시간, 엄마가 온전히 내 차지가 되는 시간이었다.  교복을 하나하나 벗어던지며 엄마가 움직이는 대로 부엌에도 갔다가 마당에도 나갔다가 엄마가 하는 일에 참견도 하고 잔소리도 들었던 평화로운 시간.

그립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밥상에 자주 오르는 김치는 단연 열무김치였다.  빨갛지도 않고 하얗지도 않은 시원한 국물이 맛있었던 열무김치.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마당 수돗가에서 열무를 다듬고 씻고 계셨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  손질한 열무를 살살 휘저어 건져내고 계셨다.  나는 옆에서 또 무언가 쫑알거리며 엄마의 손길을 바라보고, 엄마는 내 말에 맞장구도 쳐주고 같이 웃어도 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헹굼물에서 징그러운 애벌레가 떠올랐다.  아마도 나는 호들갑을 떨며 수선을 피웠겠지.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모아 윗물을 떠내며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해로운 건 눈에 띄기 마련이야"


4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이상하게 이 짧은 순간 이 장면은 마당의 햇살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얼마 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고 이날의 기억은 엄마의 열무김치뿐만 아니라 엄마의 지혜가 되어 나에게는 유언처럼 남아있다.


"그렇더라, 엄마.  세상에서 나쁜거 못된 것들은 다 드러나고 말더라.."


이제 내가 엄마가 되어 여름이면 어린 열무를 골라 김치를 담는다.

어떤 때는 하얗게 어떤 때는 붉으스름하게.

시원한 열무김치에 밥을 말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무더운 여름에 이만한 별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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