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위 Apr 01. 2024

로또와 참외

 새로 맞춘 안경을 찾기 위해 시내로 갔다. 비가 분무기를 빠져나온 듯 흩날려 우산을 챙겼다. 평소에는 카드만 들고 다니는데, 오늘은 소시민 자영업자의 희망 씨앗 로또를 사기 위해 현금 오천 원도 챙겨 나왔다. 안경점을 향해 한참을 걷고 있는데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 오빠 현금 있어? 중앙시장에 참외 있으면 사 와요.

- 현금 없는데...ㅠ

- 그럼 어쩔 수 없지ㅠㅠ


 갑자기 아내가 참외를 먹고 싶다고, 현금이 있으면 시장에 들러 사 오라고 했다. 나는 현금 오천 원이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없었다. 이건 로또를 사려고 가져온 돈이라 현금이 없다고 답장했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이 아이는 이미 선약이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거짓 메시지를 날렸다.


 '나는 안경점에서 피팅을 하고 무사히 안경을 찾아 나왔다. 거울 속에 보이는 새 안경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은 부푼 마음을 안고 로또 명당으로 소문난 곳에 들러 로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에게 새 안경과 로또를 보여주며 신나 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을 테다. 이어지는 결말은 다음과 같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아내와 함께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같이 재밌어하며 웃고 즐겼다. 갑자기 집이 건조하다며 아내가 짜증을 낸다. 내 머리가 지저분하다고 언제 자를 거냐고 또 짜증을 낸다. 나는 마구마구 터져 나오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내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억울해했다.'


 지금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살면 한 번쯤 겪게 되는 센스 없는 남자들의 슬픈 스토리.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아내의 교육과 실전 경험은 나를 성장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안경점을 빠져나오자마자 얼른 중앙시장으로 갔다. 아내는 내일이나 다음이 아닌 '지금' 참외가 먹고 싶은 거라는 숨은 진실을 상기했다. 로또라는 미세먼지 같은 미래 행복의 가능성 따위는 잠시 접어 두고, 현재의 행복을 선택하기로 했다. 오천 원은 참외의 것이다! 아내를 놀라게 해 주려고 미리 말은 하지 않았다.


 과일상점 앞에 참외가 깔려 있었다. 아뿔싸! 참외는 두 개를 한 세트로 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크기가 크긴 하지만 생각보다 비쌌다. 자잘한 게 있었지만 맛없는걸 사갈 수도 없었다. 우리 집 과일 구매는 아내가 맡고 있어서 나는 과일값 무지렁이임을 잊고 있었다. 나는 현금 오천 원으로는 참외를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카드 결제가 가능한 곳을 찾았다. 돈이 생겼으니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도 한송이 샀다. 사장님이 요즘 중앙시장은 카드결제가 되는 곳이 많다고 하셨다. 팔은 무거워졌지만 마음이 가벼워졌다. 현금 오천 원은 무사하니 로또도 샀다. 미래 행복의 씨앗과 현재의 행복 과일을 모두 손에 넣었다.


 시장을 나오니 비가 많이 내렸다. 걸으며 생각해 보니 아내가 참외 아니라도 과일이 먹고 싶었던 건가 싶었다. 과일이 어디 또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나는 동네 근처의 그릭요거트 가게로 갔다. 몇 가지 과일이 함께 담겨있는 과일그릭요거트볼과 아침에 먹을 그릭요거트를 샀다. 시장에서 돈 없는 경험을 한 반작용으로 신나게 카드를 긁었다.

 짐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왼손에는 우산, 오른손에는 안경점에서 챙겨준 서비스 물건들과 3킬로가 넘는 과일봉투, 그릭요거트 두통을 들고 십오 분을 걸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두 번의 언덕이 있다. 땀이 뻘뻘 흘렀다. 신나게 살 때만 해도 겨우 이걸로 무거움을 느낄 줄은 몰랐었다.



"참외 먹자!"

"뭐야? 현금 없다고 했잖아."


 나는 비 대신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집에 들어갔다. 아내를 향해 씩 웃으며 참외와 과일요거트볼을 건넸다. 당연히 빈손으로 올 줄 알았던 아내의 표정이 환해졌다. 무거운데 고생했다고 또 고맙다며 좋아했다. 힘들었던 순간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남편이 해야 할 당연한 일 백만 가지 중에 한 가지지만 솔직히 뿌듯했다. 우리는 과일그릭요거트 한통을 꺼내 반씩 나눠 먹었다. 참외도 하나 깎아서 맛을 봤다. 바로 이 맛이지. 이제 토요일 로또만 당첨되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머리 자르던 날의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