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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눗씨 Nov 05. 2024

눈물에 쪽대본

방송 작가는 시간에 쫒겨 삽니다.

생방송 프로그램도 퀴즈 프로그램 못지 않은 긴장의 연속이다. 녹화방송이야 실수가 있으면 다시 할 수 있었지만 생방송은 '다시'가 없다. 그래서 생방 전부터 긴장감과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또 스케줄이 넉넉하지 않으니 밤새는 일이 많았고, 잠을 못자 정신력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크고 작은 실수가 생기기도 했다.  

지금은 <KBS2 생생정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은 초창기 <KBS2 생생정보통>이었다. 작가들이 기피하는 프로그램 중에는 생방송 프로그램, 처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생생정보통>은 처음 시작하면서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그만큼 힘들다. 이때 MC중에 전현무 선배님이 있었다. 내 휴대전화에는 아직 전현무 선배님의 연락처가 있어서 우리 아이들이 <나혼자 산다>를 보고 한번 전화해보라고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곤 한다. 친하면 전화해서 아이들과 통화할 수 있게 해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친하지 않다. 다만 전현무 선배님은 어느 작가에게나 격없이 대해주셨던 게 생각난다.  빼빼로 데이날 팬들에게 받은 빼빼로를 함께 먹자며 나눠주시기도 하고, 인사도 항상 밝은 미소로 잘 해주셨다. 대본 리딩 때 실수로 잘못 쓰인 부분을 발견해도‘허허’웃고 슥슥 고치며 쿨하게 넘어가주시기도 했다. 방송도 사람이 하는 일이듯 꾸준히 방송에 나오고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인성이 좋은 분들이 끝까지 살아남는 것 같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누구는 촬영 시간을 잘 지키고 예의바르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그런분은 인기가 시들어도 작가들이 찾게 된다. 지금의 전현무 선배님이 성공하신 걸 보면 똑똑한 머리와 함께 성실, 인성이 함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전현무 선배님이 생각나는 <KBS 생생정보통>에서 나는 <대한민국 1%>라는 코너를 맡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취재하는 코너였다. 나무도마 만드는 사람, 고무장갑 만드는 공장, 유리공장, 가마솥 만드는 사람 등을 찾아다녔다. 아이템을 정하는 기준은 이제는 사라져가는 직업, 만드는 과정이 특이한 경우, 극한 상황에서 땀흘려 일하시는 분 등이었다.  일주일에 한편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헌팅 - 아이템 선정 - 자료조사 & 취재 -  촬영구성안 – 원고/자막’ 이렇게 해내야 했다. 보통 교양방송은 헌팅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코너는 일하는 모습과 현장을 보고 방송으로 나갈 그림을 알아야 하기에 헌팅이 필수였다. 이때는 잠잘 시간도 부족하고, 밥먹을 시간도 부족했다. 잘 못자고 잘 못먹으니 살이 많이 빠졌고 예민의 극한을 달렸다.  

게다가 섭외를 해두면 촬영 바로 전날 펑크가 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시사 이틀 전에 모두 엎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섭외할때도 항상 '갑자기 촬영을 해야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분들도 촬영 준비를 해야할텐데 우리는 출연자분에게 촬영 준비할 시간을 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에 막내작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우리 프로그램의 막내작가는 남자 아이였는데, 너무나 느긋한 이 아이가 나와는 맞지 않았다. 모든 작가들이 숨을 헐떡이며 일주일 안에 방송을 만들어내느라 밤을 새고 있는데, 우리의 막내는 양반인지, 11시에 출근해서 컴퓨터 켜고 앉아있다가 점심시간이라며 점심 먹고. 말도 어쩜 그리 잘하는지 능글능글, 뺀질뺀질 내 속을 뒤집어 놨다. 지금은 아이 낳고 성격이 많이 둥글둥글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용납안되는 건 내뱉고 말았던 나는 막내에게 매일 같이 잔소리를 해댔다. 결국 막내는 2개월 만에 그만뒀는데, 후에 작가를 아예 그만뒀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작가를 그만둔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편, 생방송을 하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말 시간에 쫒겨서다. 이때는 일명 ‘쪽대본’이 일상인 시기였다. 대본이라 하면 PD가 편집한 영상을 보고, 한편의 이야기를 쭉 쓴 후에 맞춤법까지 한 번 점검 후 더빙을 보내야 정상인건데, 이 프로그램에선 완벽한 한편의 대본을 보낸 적이 없었다. 시사할때 옆에 노트북으로 대충 흐름을 적어뒀다가 수정까지 끝난 편집 영상을 받으면 그때부터 빛의 속도로 글자를 채워넣었다. 더빙시간은 가까워 오고 한편을 다 쓸 시간이 없어서 일단 쓴 것까지 보내고, 보낸 부분 더빙하고 있으면 뒷부분을 마저 써서 보냈다. 시간은 촉박한데 글을 쓰다 막히면 뒷골이 땡기고 뇌가 쫙쫙 펴지는 기분이었다. 겨우겨우 써서 보내고 나의 쪽대본을 하나로 모으며 다시 읽어보면 맞춤법 틀린 것, 띄어쓰기 틀린 것, 어색한 표현이 보인다. 이미 보낸 원고 다시 손볼 수도 없고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리며 작가로서의 자괴감이 들었다. 원고 내레이션은 개그맨 김경식 선배님께서 해주셨는데 생방송을 위해 방송국으로 가기 전, 몇 시간 눈 붙이기 위해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맞춤법 틀려서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한숨이 푹푹 나왔다. 선배님이 이해해주셔서 다행이었지만 작가를 하며 괴로운 일 중 하나가 맞춤법 틀리는 것이었다. 김경식 선배님의 유쾌한 입담에 내 원고가 제 할일을 못하는 것 같아 항상 죄송스러웠고, 나에게 조금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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