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집에 살고있는 분은 나와 프로그램 두 개를 같이 했다. 내 핸드폰에는 아직도 ‘돼지 피디’로 저장되어 있다. 술을 끊지 못해 배가 불룩하기에 여전히 우리집에서 ‘돼지’로 명명되고 있다.
매일 원고나 구성안 쓰고, 섭외하고, 녹화 또는 생방가고, 누굴 만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피디뿐이다. 주변에 결혼한 작가 언니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일이나 하지 왜 연애를 하고 그래!" "빨리 도망가!"
피디남편의 성격은 정말 피디로 어울리지 않았다. 숫기도 없고, 서글서글하니 먼저 말을 걸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교양피디로 벌어먹고 사는지 의아했다. 일반인들한테 인터뷰 한 줄 따지도 못할 것 같았던 피디남편은 촬영만 하면 갑자기 돌변하는 반전의 모습이 있었다. 그래. 밥은 먹고 살겠구나 싶어 결혼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피디남편은 어딜가든 내 손바닥 안이다. 작가들의 레이다에 걸리기만하면 나에게 연락이 왔다. "신피디님 지금 꼴통치킨에서 술마시고 있네~" 촬영때문에 늦는다더니 딱걸렸다. 이것저것 듣고 싶지않은 그 남자의 소식은 꾸준히 나에게 들어왔다. '나 이번에 어떤 프로그램에 갔는데 거기에 언니 남편있더라!' 내가 다른 프로그램에 가도 '남편이 신피디라면서요?' 라며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다른 피디들과 술먹을때도 고삐 풀린 피디들이 자꾸 피디남편에게 헛소리를 했다. "나 이작가랑 형, 동생하는 사이잖아!"라며 괜히 신경전을 부렸다. 방송 바닥은 좁은 사회여서 피디남편이 전에 사귀었던 작가의 소식까지 저절로 내 귀로 들어왔다. 어딜가나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달고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점도 있다. 특히 섭외할 때 이런저런 케이스, 장소, 방송 아이템 등을 피디남편과 공유했고, 알바를 할 때도 남편이 물어오면 내가 서포트해주며 작가료까지 챙길 수 있었다. 제작사를 옮길때도 그 곳의 평판과 함께 일할 피디들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피디남편과 아는 사이들이니 나에게 잘해주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이 결혼이 잘못됐다 생각한 건 지방으로 놀러가며 준비할때였다. 어떤걸 챙겨야 하는지 피디남편은 나에게 ‘지시’를 했다. 흡사, 조연출에게 카메라와 배터리와 조명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듯이. 그리고 자꾸 귀찮은 일은 나에게 떠넘기는데 나는 또 원래 뭐든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계속 내가 했다. 본인의 편집 구성안 프린트를 나에게 요구하거나 간단한 글을 작성해야 하는 경우도 나에게 떠넘겨왔다. 나는 방송일, 집안일까지 혼자 다하는데, 여행을 간다고 하면 여행준비, 피디남편의 가족행사까지 모든게 나의 몫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점점 부당하다고 느꼈다. 흔히 어른들이 이런말을 한다. 초장에 버릇을 잘 들여야한다고. 피디남편은 팀장, 나는 조연출같이 되어버린 상황에 몇번 성질이 올라왔다. 처음엔 정말 무진장 싸워댔다. 음식물 쓰레기 하나 버리러 가는 것도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집안일은 무관심. 후배들과 매일같이 술마시며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를 하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 졌다.
지금까지 이혼하지 않고 살게 된 이유 첫 번째는 아이들이었고, 두 번째는 피디남편의 카드를 뺏은 것이고, 세 번째는 서로에게 터치하지 않고 자유를 준 것이다.
피디남편의 카드를 뺏을 것은 피디남편이 작가아내가 일을 계속 하니 마음놓고 카드를 긁으며 술을 먹어대 한달 술값으로 300만 원이 넘게 나왔기 때문이다. 몇 년 계속 참다가 터져 카드를 압수했다. 아이들이 커가며 들어갈 돈은 많아지는데 노후가 보장되지 않은 프리랜서 피디와 작가에게 지금 당장의 '젊어서 노세'는 독약이다. 카드를 뺏고 용돈을 주며 가정의 평화를 유지했다. 그대신 술먹고 늦게 들어오는 건 터치하지 않았다. 놀땐 마음껏 놀게 두었고, 그대신 나도 아이들과 여행가고 싶으면 마음껏 눈치보지 않고 떠났고, 사고 싶은 책은 마음껏 샀다. 그리고 음식물쓰레기, 재활용 분리수거 정도는 피디남편의 몫이고, 아이들 학원 픽업도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으니 마음껏 피디남편을 이용했다. 피디남편의 나머지 쉬는 시간은 침대와 한몸이 되어 움직이지 않아도 그렇게 그냥저냥 살아간다. 일이 없을땐 "나 줄 알바 없어?" 툭 던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