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를 낳고 초보엄마는 우울에 휩싸였다. 온몸이 아프고 잠도 못자고 밥도 잘 못먹었다. 예민한 나의 아이는 매일 울었고, 나도 함께 울었다. 다른 작가들은 열심히 방송하며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데, 나는 집에 갖혀 아이 똥기저귀 갈아주고 있는게 한심했다. 힘들게 쌓아온 내 작가 생활이 끝날 것 같았고, 불안했다. 피디남편은 <KBS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할때였고, 3주 내내 지방에서 촬영을 하고 또 2주 내내 밤새워 편집을 했다. 갓난 아기와 나혼자 집에 갖혀 우울에 잠식되고 있었다. 내가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방법은 책을 읽고, 글쓰는 것인데 아이를 안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피디남편은 내 성격이 예민해서 우울증이 왔다고 했고, 그 말이 가시가 되어 내 마음에 박혀 미움만 싹텄다.
지금도 첫째 아이가 예민한 것이 내 우울 때문인 것 같고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조금만 아이에게 많이 웃어줬으면' '조금만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내 아이도 작은 일에 예민하게 굴지 않을텐데 생각했다. 첫째와 터울없이 둘째도 금방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은 나에게 저질체력에 자궁만 튼튼하다고 웃픈 말을 했다. 둘째가 뱃속에 있을땐 애 하나도 키우기 힘든데 둘은 어떻게 키우나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둘째가 태어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첫째는 자기도 아기면서 동생을 아꼈고, 둘째는 둥글둥글해서 100일전부터 혼자 누워서 잘 잤다. 신기하게 애 하나보다 둘이 수월했다. 때맞춰 예전 팀장님으로 부터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재택으로 내가 받아야 할 페이를 대폭 할인하며 방송에 복귀했다. 아이가 낮잠잘때 섭외 전화를 돌렸고, 아이가 밤잠 잘 때 글을 썼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아이들이 기관에 다니고 다시 본격적으로 출.퇴근하는 방송을 시작하면서 첫째 아이의 마음에 빗금이 쳐졌다. 나는 이제 살 것 같은데 첫째아이는 저녁 6시까지 유치원에 있어야 하는 걸 힘들어했고 툭하면 울었다. 급기야 아이에게 어깨를 움찔움찔하는 '틱'증상이 나타났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혼내도 보고 달래도 보고, 매주 심리상담을 가서 놀이치료도 받았다. 첫째 아이의 증상은 더하면 더했지 괜찮아 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의 퇴근시간을 조정했다. 일을 하다 3시 반에 퇴근, 전력 질주하여 4시 반에 아이를 하원시켰다. 3년만 이렇게 살면 우사인볼트의 기록도 깰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 힘은 아이의 얼굴이 내 머리위로 두둥실 떠오르며 생겨난 힘이었다. 다행히 첫째 아이는 4시반에 하원 후, 태권도 학원에서 운동하고, 점점 마음도 단단해졌다.일찍 회사에 가야하는 날에는 둘째 딸아이의 머리도 못 빗겨주고 갔다. 하원길에 선생님은 “어머님 연서가 오늘 산발을 하고 왔어요.”라고 하셨다. 우리 둘째 딸은 피디남편의 우월 유전자인 곱슬을 이어받아 심각한 곱슬 머리다. 그 심각한 곱슬 산발을 어린이집 선생님은 예쁘게 정돈 시켜 주셨다.
이 힘든 시기에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일했던 프로그램을 만났다. 지금까지 방송 중에 가장 오래한 <SBS생활경제>다. 이 프로그램은 경제 프로그램으로 내가 맡은 코너는 <돈의 법칙>이다. 경제부 기자님과 자산관리 연구소장님의 대담으로 만든 스튜디오물이었다. 지금까지는 더빙 원고만 쓰다 출연자 두 명이 핑퐁게임하듯 주고받는 대담형식이 재미있었다. 상암 SBS가 나의 일터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전체가 통유리여서 그 안에서는 뭔가 '미래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매주 목요일 대본 리딩을 하고, 녹화를 했다. 그동안 해왔던 프로그램 전체 녹화도 아닌 출연자 두 명이 전부인 작은 녹화였지만 오히려 녹화장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들만의 잔치' 같아서 좋았다. 경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자막부터 멘트까지 재미요소를 넣었고 오프닝도 패러디 등으로 꾸몄다. 물론 자료조사나 대본 쓸때는 고민을 많이 했다. 경제라는 아이템 자체가 딱딱하고 어렵기 때문에 최대한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 역할을 두 분의 출연자들이 적절히 잘해주셨다. 감사하게도 지금 두분은 모두 경제 방송으로 승승장구 하고 계시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정해져 있어 따로 섭외가 필요없었기 때문에 원고를 잘 쓰는 게 우선이다. (가끔 손수호 변호사님 같은 분을 섭외하기도 했다.) 경제 프로그램도 계속하다보니 아이템 선정부터 어떤 걸 중점으로 써야하는지 노하우가 생겨 수월했다. 아이낳고 못했던 방송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나는 월 1,000(만 원) 작가를 꿈꾸며 메인 프로그램인 <생활경제>에 SBS 협찬 하나와 CNBC 케이블 프로그램을 하나 더 했다. 그만큼 일에 자신감이 붙었고, 소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잠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2~3시간 정도 밖에 못자고, 저녁으로 아이들 햄버거 시켜주면서 나는 먹지도 못한 채 식탁에서 대본을 쓰는 날이 많았다. 첫째 아이를 유치원에서 픽업해 태권도 학원에 넣어주며 정신없이 차를 몰다가 후진으로 인도위를 올라간 적도 있었고, 아이도 아닌 내가 옷을 앞, 뒤 거꾸로 입고 나간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매일 매일이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첫째 아이의 '틱'은 시간이 지나며 괜찮아졌고, 엄마가 일할때 남매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 의지하며 사이좋게 잘 놀았다. 남매가 서로 성향이 비슷해 사이좋게 지내는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꾸준히 해준일은 딱 하나였다. 잠자기 전에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 (지금은 초등4학년, 6학년이어서 청소년책을 주로 읽어준다.) 아이들은 그 시간을 너무 좋아하고 행복해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원없이하고, 아이들도 싸우지 않고 잘 지내주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심성이 착해서 잘 지내준 것 뿐, 작가 엄마는 한없이 부족해 첫째 아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한글도 못가르치고 입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