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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Nov 14. 2019

 시를 쓰고 싶다. 하지만 시를 쓰기에는 내 깜냥이 부족해 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보니 랩이 시보다 못할게 뭐가 있나 싶다. 난 랩을 시보다 더 사랑하는데. 시라는 것을 즐기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는 신 포도가 아니라 못오를 나무 쳐다보듯이 한다. 랩도 못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쨌든 시를 쓰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이긴 하다. 하지만 산문보다는 시를 쓰고 싶었다. 역시나 연시가 좋겠다. 아니 연시를 쓰고 싶었다. 연서를 많이 써 조금 뻔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연시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시는 너무 나에게 멀게만 느껴진다. 사실 나는 이렇게 쓰다보면 이 글이 산문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산문시와 산문이 무슨 차이인지도 나는 모른다. 상징과 비유 같은 용어들이 머리 속에 떠다닌다. 연인을 상징하고 비유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시는 너무 어렵다.

 결국 내 연인에게 다른 방식으로 내 사랑을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나름 기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멋들어지고 싶다. 멋들어지게 내 사랑을 표현해주고 싶은데.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외로울사 이 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한시를 이렇게 한글로 옮긴 시를 나는 학창 시절 배웠다. 한자를 알면 감흥이 배가 됐겠지만 그 때도 감흥이 꽤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꽤나 시간이 흐른 몇년 전까지만해도 이 시를 즐기곤 했다. 그래, 나는 시를 썼었다.

 시를 쓰지 않게 되었다. 왜그럴까, 지금의 생활이 시적이라서라는 유치한 말은 하지 않겠다. 이 행복한 마음을 시로 써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시를 쓰지 못하겠다. 산문으로, 편지로는 가능한데 말이다. 낯간지러워서도 아니다. 그저 한글자 한글자를 고르는게 나한테는 너무 부담스럽다. 시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부담스럽다. 

 아내를 뺏기고 돌아온 유리왕이 꾀꼬리를 보며 슬피 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나는 그 꾀꼬리 중 하나가 나임을 그릴 수 있다. 나는 꾀꼬리다. 훨훨 날고 있다. 다정히 노닐고 있다. 하지만 나는 유리왕이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저 꾀꼬리가 바로 나다

나는 훨훨 날고있다

유리왕처럼 나는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나를 보는 자다

날 수 있을까? 영원히 날 수 있을까?

나는 날 수 있어도, 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지라도

날아다니는 와중에, 날 수 있는 능력을 갑자기 얻었을 때처럼

갑자기 그 능력을 상실해 곤두박질칠까봐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아예 나는 것 자체를 시도하지 않을 놈이다

나는 지금 날고 있는가

저 밑에 슬피 우는 내가 보이니 나는 날고 있나 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날고 있는 나 또한 보고 있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너와 다정히 노니는데

도대체 왜 이 내 몸은

도대체 왜 이 내 몸은

뉘를 보고 있는가

나를 보고 있는가


나는 이런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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