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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Jan 04. 2020

coffee

 커피가 식어간다. 커피를 마시며 커피에 관해 글을 쓰려하는데 커피가 식어간다니. 화웅의 목을 벤 관우처럼 이 커피가 식기전에 글을 마무리할 수는 없을 듯하다. 쓸 거리가 많은 건 아니지만, 길게 쓰고 싶으니까. 길게 쓰는게 그래도 글을 연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소인에겐 아직 한번의 리필 찬스가 있으니, 리필한 커피가 식기 전에는 이 글을 마치리라.

  쌉쌀한 맛의 커피. 도대체 무슨 맛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위스키에서 바닐라 맛이 난다까지는 용납 가능한데 방금 메뉴판에서 본 케냐산 드립커피에서 딸기 맛이 난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정말 이 커피에서 딸기 맛이 난다고 생각하세요?” 주인에게 물어보고 싶다. 곱게 늙으신 카페 안주인은 멋쩍게 웃으며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아요.” 하겠지. 어쨌든 이 커피는 딸기 맛이나는 커피이다. 이왕 식도락가라고 자부하는 나니까 그냥 이런 맛이 딸기맛이겠거니 하도록한다. 아니, 못하겠다. 딸기맛은 딸기맛이지. 이건 그냥, 커피맛이다.

  커피의 맛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번엔 커피의 멋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어릴 적만해도 커피를 마시는 어른은 뭔가 멋있어보였다. 엄마아빠가 식당에서 밥 먹고 뽑아먹는 자판기 커피 말고, 보기만해도 위압감이 드는 머그 잔에 마시는 블랙 커피. 막상 먹어보면 맛대가리도 없었지만 분위기 있는 그 자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라면을 먹을 때의 천박한 후루룩 소리가 아닌 고상한 "후루룩". 옆에 놓인 시집까지. 마치 은하철도 999의 메텔처럼. 메텔은 커피를 좋아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하지만 나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커피가 이젠 그다지 멋지지 않다. 그 전 글에 썼듯이 가까워지면 점점 멋은 사라진다. 물론 아직까지도 커피가 주는 큰 분위기가 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며 맥북에어로 워드에 글을 쓰고있는 나의 모습은 조금 멋있어보이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젠 커피는 소품화가 되버렸는 지도 모른다. 길가는 멋진 힙스터들이 모두 하나씩 들고있는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잔처럼. 소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소품에 죽고사는 사람이니까. 오늘도 선글라스를 쓰고 이 카페에 당당히 입장했다. 자신감 급상승의 아이템. 사실 나는 렌즈도 안껴서 앞이 잘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떠냐 선글라스를 쓴 나는 멋지고 그 멋진 나는 딸기맛 나는 커피를 마시러왔다.

  커피라는 소품의 맛과 멋을 즐길 줄 아는 나는 단순히 커피의 멋을 동경하던 때에서 한 뼘 정도 더 자란 느낌이다. 머리는 여러가지 잡념들로 인해 한 돈 만큼 더 무거워졌다.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크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나의 변곡점과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겹친다. 성장한 지금의 나를 마시면 씁쓸한 커피맛이 나려나. 분명 달지는 않을 듯 싶다. 고민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주변에서 나를 귀찮게 구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나는 설탕, 프림, 우유 등 잡다한 것을 넣지않는 아메리카노만을 마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만이라도 단순하고 싶다.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다. 잡념으로 조각 조각난 내 마음은 씁쓸한 맛이 난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를 사랑하게된다면, 딸기 맛이 날지도 모르지. 그럼 나는 멋쩍게 웃으며, “정말 딸기맛이 나네요.”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

  리필한 커피가 나왔다. 워낙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는 나 이다보니 이 커피를 다 마시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남기면 어때,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며 맥북에어로 워드에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커피의 멋을 충분히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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