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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Jan 19. 2020

반성문

 신이 있다면, 나를 멈췄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나를 벌했을 것이다. 벌을 받아도 좋으니, 나를 멈춰달라. 항상 그렇게 나는 기도를 드렸다. 나는 신을 믿는다. 어떤 신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운명으로 칭할까 한다. 운명이여, 나를 멈추어달라. 하지만 신실히 기도를 하는 내 자신은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다. 나는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 달려간다. 시작이 있다면, 폭주가 있다면 끝이 있는 법. 나는 그 끝이 절벽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나쁘지 않은 아침이다. 아침에 일어나 단골 카페에 와서 할 것들을 정리한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나는 글을 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좋다. 글을 쓸 때 나는 내 자신을 토해낸다. 동시에 나는 연기한다. 오늘은 불행한 역을 맡은 내 글은 신을 찾는다. 연기라... 지금의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불행, 불안에 대해 글을 써내려 갈 때 내 글이 더 재밌어 보이는 것이 하나다. 둘째로, 나는 카멜레온 같은 배우가 아니어서 관성적인 연기를 한다는데 있다. 내 많은 시기를 지배한 것이 불안이니, 나는 이 역에 자신 있어 페르소나가 따로 필요 없었다. 가끔은 메소드 연기로 내 행복을 펼쳐보이지만 결국은 본연의 역할로 돌아왔다. 

 

 그러한 나는 지금 반대 성격의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상당한 불안을 안고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내 지금 상태는 행복이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연기 하는 글을 쓰는 걸까? 오히려 현재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 부담감과 능력의 부족을 절실히 느낄까?  필히 내가 행복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이 익숙치 않다. 나는 자꾸 내 불안을 꺼내 든다. 물론 행복을 노래하기도 한다. 사랑을 담은 편지도 쓴다. 내 글을 읽은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더랬다. "민성님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그 속의 결핍감을 느껴요. 너무 많은 다짐과 결의가 오히려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해요." 나는 행복조차 써내려가지 못하는 사람인가? 주구장창 Love & Peace를  외치지만 내 맘 속에는 평화가 없는 듯하다.


 사랑을 얘기할 때, 나는 지원이를 향한다. 지금이 행복하다는 글을 쓰려해도, 결국 지원이에게 말을 건네고, 확인 받으려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쓴다. 오히려 지원이라는 수신인이 읽지 않았으면 하는 글을 쓴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으니 발신인 또한 불명인 것은 마찬가지다. 벽에다 대고 가짜가 소리 친다. 이 파동은 반사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저, 이 소리가 아름다운지 귀를 기울인다. 자아도취의 정도가 지나치다. 왜 내 글에는 거짓이 득세하고 진실은 미약한가?


 다짐을 한다. 나는 다짐이 필요한 사람이다. 지금 나는 가스펠을 들으며 기도를 하고 있다. 


"신이시여, 저는 이제 한 역에 정차하였습니다. 이곳은 고즈넉하고 안온함과 정이 가득합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저는 영원히 행복하고자 합니다."


 이제 벌을 받을 차례다. 아니 이미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내가 쓰는 반성문이다. 몇 문단의 거짓들로 내 죄가 씻겨진다면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계속 쓰기를 반복하겠다. 신에게 감사하다. 적어도 이곳이 절벽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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