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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Feb 18. 2020

향연

1  


 A는 해안도로를 따라 걷고 있다. 날씨가 선선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 산책을 하기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하지만 A는 산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산책은 시선이 필요하다. 나뭇잎이 울긋불긋한 나무들을 보던가, 지금 A가 쉽게 볼 수 있는 파도 치는 바닷가를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외면이 특기인 사람이라오늘도 땅을 보고 걷는다. 마주치는 이웃들은 언제나 살갑게 인사를 건네나 A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침실과 화장실 하나, 거실과 부엌은 합쳐진 화려하진 않지만 넉넉한 집이었다. 가구는 나름 고동색으로 일관성을 갖추었으나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가전 제품들은 구식이었고, 옷 또한 계절과는 연관성이 적었다. A는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하나 꺼내 마신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집이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파제가 파도와 부딪혀 큰 소리를 낸다. 거실과 연결된 통유리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있다. 6월의 햇빛, 남쪽 땅끝 마을의 살기 좋은 날씨는 그녀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침실에서 한 남자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는 여행을 올 때에도 잠옷을 챙기는 사람이다. 남색 펑퍼짐한 잠옷을 입은 그는 이 마을에 단정한 남색 정장을 입고 이틀 전에 도착했다. A는 우유를 건넨다. 그는 하품을 하며 자신은 유당불내증이 있다고 거절한다. 그녀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외면하며 장바구니를 펼친다. 계란을 두개 깨고 후라이를 만든다. 노른자가 익어 퍽퍽해지기 전에 후라이팬에서 계란을 꺼내고 오렌지 주스를 꺼낸다. 그 사이 남자는 예의 그 남색 정장을 입은 후였다. 계란과 주스를 본 그는 이게 다냐는 듯 그녀를 흘겨본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는 눈길로 A를 쳐다보지만 그녀는 말이 없다. 그는 여행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며 그녀의 SNS 주소를 물어보지만 허탕이다. 

핸드폰으로 전화가 한통 온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잘지내냐는 그의 안부 인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있다. 시골 살기가 팍팍하지 않냐고, 서울로 다시돌아올 생각은 없냐 물으시며 가게라도 내준다고 오늘도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신용카드는 왜 거의 쓰지도 않냐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타박을 시작하는 와중에 그녀는 나가야한다며 전화를 끊는다. 나른한 밤이 오고 그녀는 나갈 채비를 한다.

 항상 앉던 자리에 앉는다. 땅끝 마을이 매스컴을 타고 유명 관광지가 된 후부터 마을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금 그녀가 자리한 바만 하더라도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그녀의 친구가 열었다. 바 자리가 다섯 개이고 둘이 앉을 수 있는 작고 낮은 테이블이 전부다. 비수기라 관광객들이 적어 오늘도 바는 한산하다. 바 주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순박한 시골 청년이 와서 우물쭈물 주도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보지만 주인은 설거지를 보며 한숨만 짓는다. 그녀는 가끔은 그들과얘기를 주고 받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전등 불에 비친 칵테일의 색을 보는데 할애한다.

 여행은 사람들의 마음에 낭만을 심어준다. 그녀가 가장 오래 사귄 남자 친구는 학창 시절 유럽 배낭 여행 때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직장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퇴직을 하고 낭만을 찾아 유럽으로 여행을 온 것이었다. 둘은 트레비 분수에서 처음 입술을 맞대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그녀는 헤어졌다.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워 놓고는 A에게 ‘목석’이라고 성적인 비아냥을 하며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을 온 것도, 낭만을 찾아 온 것도 아니었다.

 반면 국내 여행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낭만을 심어주지는 않는다. 약간 들뜨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이 마을에, 이 바에 온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이 조그만 관광지에서 당일에만 있다거나, 하루 이틀 정도를 묵다가 가는 것이 대개이다. 서울, 부산 등 그들의 출발지는 이 곳에서 어떻게든 반나절 정도면 갈 수 있었고 그들의 핸드폰은 언제나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준비 태세를 하고 있다. 이 바에는 주로 젊은 여성 두 명이 짝으로 올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바 한켠에 앉아있는 그녀는 자리를 구석으로 옮겨 양보하기 일쑤였다. 그녀들은 인스타그램에서 반응이 뜨거운 지역 특산 전통주로 만든 칵테일을 시켜 사진을 한 장씩 찍은 후 바다를 보러 간다. 달디 단 그 칵테일은 막걸리와 초콜릿 리큐르로 만든 것이었는데 알콜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들어 파는 주인 조차도 “이걸 왜마시는지 모르겠다.” 말하지만 가게의 주 수입원이니 군말 없이 만들었다. 반면, 그녀는 언제나 독주를 마셨다. 스마트폰도 가방에 고이 넣어 놓는다. A의 핸드폰 카메라는 기능을 한 지 매우 오래되었다.  





 B는 낭만을 지니고 이 마을에 여행 온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명 사진 스팟에 관심이 없었다. 아침을 버스 터미널 내에 있는 우동집에서 떼웠다. 바닷가를 조금 걷다 근처 횟집 겸 민박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어쩔 수 없이 잡어회 소자를 시켜 소주를 반주로 깨작거린다. 회 한점에 소주 한잔을 먹는다. 어느새취한 그는 주인 아주머니께 민박집의 방을 묻는다. 빈 방은 많았고 피곤한 상태에서 그는 짐을 풀고 낮잠을 잔다. 어스름이 져갈 때 그는 약간의 두통과 함께깨어나 다시 바닷가를 걷는다.

 B는 두통이라도 가시게 하려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잠깐의 낮잠이었지만 B는 짧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그는 바닷가를 걸었다. 매우 큰 소라를 밟을 뻔 했다. 그는 그 소라를 들고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가 웅얼거리는 소리, 그가 소라를 흔들어보자 한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나는 안내 받았어요

보통을 살았답니다

대개 만족했지요 


 다시 소리가 뭉그러져 잘 들리지 않는다. 그는 다시 소라를 흔든다. 


보통을 살았답니다

기껏 만족했지요 


 갑자기 소라에서 소라게가 기어나오자 그는 깜짝 놀라 쥐었던 소라를 떨어트리고 잠에서 깬다. 


 마침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2층으로 된 큰 카페가 있다. 이 마을의 첫 대형 자본이었다. 여행객들은 대개 2층의 흔들 의자에서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마을 사람들은 1층을 차지한다. 타지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마을의 젊은이들이다. 마을의 사랑방인 그 카페 1층에서 사람들은 문을 열고들어오는 여행객들을 흘끔흘끔 거리다가 마을 누군가에 대한 험담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가 카페로 다가간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퍼지는 담배 연기가 매캐하다. 돌아보니, 한 골목에서 한 여자가 담배를 피고 있다. 재떨이가 놓여있는그 가게의 출입문에는 칵테일 해피 아워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바다를 본다. 점점 더 어두워 지기 시작한다. 그는 해피 아워가 끝나기 전에 예의 그 Bar로 들어간다.   





 독한 마티니를 마시고 입이 건조한 A는 담배를 피고 바닷 바람을 들이 마실 겸 밖으로 나온다. 그녀가 이 바닷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었다. 담배 연기의 텁텁함을 이 소금 향이 조금 지워준다. 어느덧 밤이 시작 된다. 6시부터 8시까지. 칵테일을 3천원 싸게 판매하는 해피 아워가 끝나 간다. 하지만 그녀는 들어갈 생각이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술이 더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마치 포춘 쿠키를 뜯는 것만 같다. 술잔을 비워서, 잔밑을 내려다본다. 그 속에 답이 있길 바란다. 물론, 답이 없다는 것 쯤은 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포춘 쿠키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지 않는가. 그저 뜯는 것 뿐이다. 마시는 것 뿐이다.

 8시가 다 되어갈 즈음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청바지에 낙낙한 셔츠를 입고 있다. 순간 바 주인이 긴장한다. 그녀가 일할 때 가장 즐거울 때가 젊은 남자가혼자 들어올 때이다. 티는 내지 않지만, 조금 더 술을 많이 타 남자들이 취하는 것을 보길 즐긴다. 하지만 남자들은 대개 A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때가많아서 그녀는 살짝 질투감을 A에게 느끼고 있는 와중이다. 그 남자, B는 독한 술을 시킨다. 마티니다. 주인은 역시나 진의 비율을 늘린다. 하지만 오늘밤도주인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저도 마티니 마셨는데.” 


 A는 마티니가 주문 되자마자 B에게 말한다. 주인은 또 시작이구나 생각한다. 그녀는 A에게 눈을 흘긴다. 그러면서도 조금 부럽다. 사실 이 멘트는 A가 자주쓰는 패턴이다. 그녀의 취미다. 여행자들의 낭만을 이용해 그녀의 하룻밤 취기를 해소한다. 집에 들이고, 집에서 내보낸다. 외로움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녀는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실은 이 바 바로 옆 바닷가 1층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기 일수였다. 그들은 A를 ‘서울에서 내려온 문란한 처자’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그녀는 왠지 모를 애수를 풍기고 다녔기 때문이다. 인사를 잘하지 않아도, 마을 커뮤니티에잘 참여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들에게 ‘어딘가 사연을 품고 있는 여자’ 였다. 


“폼 잡고 싶었어요.” 


 B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는 007이 마티니를 자주 시킨다 말한다. 그래서 자신도 맛은 모르지만 열심히 마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매력적인 말은 아니다. B는 사실 숙맥에 가까워, 자신을 어필하는 법을 잘모른다. 보통 그것을 매력으로 여기는 여자들만이 그를 좋아해줬을 뿐이다. 여행이랍시고 자주 입지 않는 청바지에 셔츠를 입었지만, 오늘 낮에 A의 집에서 나온 남자처럼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 자주 입는 비즈니스 캐주얼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여자들에게큰 주의를 끌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가게에서는 철지난 노래들이 나온다. 최근 유행이 된 80, 90년대 음악들이다. 그래도 주인은 음악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유행을 따르지만 그 시대의 음악들중에서도 나름 선곡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 세계에도 한계가 있어 격일로 같은 플레이리스트가 반복된다. 지금은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세월을 한탄하는 곡이다. 지나간 사랑 마저 잊혀져 가는 세월이 야속하다고 여자 가수는 담담하게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도 A는 이 노래를 안다. B는 모르지만 주인의 의도대로 취기가 올라오며 말한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부적절한 말이다. 처음 본 여자에게는 더더욱. 주인의 질투감은 가셨고 이들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A도 뻔한 말로 답한다. “맞춰 보세요.”


“스물 아홉?” 


 A는 웃는다. A는 올해로 서른 하나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난 지 스물 아홉 해가 지났을 때, 그녀는 낙태를 했었다.  





 연락처도 몰랐다.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찾아본 것은 웃기게도 페이스북이다. 그는 그녀에게 핸드폰 번호와 이름을 알려줬지만결번이었다. 회사의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XX 상사. 저장된 이름과 회사 이름을 조합해 구글에 검색을 해보지만 허탕이다.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녀는 좌절한다. 성수기, 바닷가에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부모들이 아이들과 뛰어놀 때 그녀는 가까운 대도시 병원에서 애를 지우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참았던눈물이 방으로 들어와 비로소 터진다. 부모님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다. 친한 친구들은 그녀가 내려온 후 대부분 멀어진 후였다. 그녀는 안정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아니, 사실 지워진 것만 같다. 하지만 흉터는 아직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다.

 처음에 이 곳을 왔을 때 그녀는 1년을 잡았다. 그 정도 살다가, 서울로 올라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그녀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후 벌써 3년째다. 그녀는 네댓 번의 성수기를 거친다. 해는 빠르게 바뀌지만 그녀는 그대로다. 그저 더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리고, 그녀는 여행자들의 낭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도 이 마을 또한 도락이었기에.

 그래서 밤은 그녀의 독무대였다. 그녀가 인스타의 지역 명물로 소개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와 잤다. 한번은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한 여성과도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 그녀는 딱히 바이섹슈얼이 아니었지만 그 여성에게도 낭만이란 것이 있기에 사냥감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낭만을 사로잡아도 아무런 명예가 없다. 심지어 그 사람의 마음에 생채기를 줄 수도 없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던 남자처럼 할 수가 없다. 낭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어차피 여행객들은, 그 마을에 낭만을 두고 올 작정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없는 장사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B가 A의 사냥감이다. B의 낭만을 사로잡아 그녀는 그 낭만을 내일의 빨랫대에 걸어놓을 작정이다.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다. 애수에 젖은그녀의 눈이 하나의 방법이라면 방법일 것이다. 그녀와 그는 꽤나 긴 대화를 나눈다. B는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해 어쩔 줄 모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고 돌아올 때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아침 일찍 눈을 뜬다. 여느 때처럼, 장을 보러 갈 작정이다. 거실 겸 부엌으로 나가자 B가 보인다. 그는 말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A는 꽤나 놀란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B가 계란 후라이를 하는 것을 보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동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이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도 결국 오늘 점심이면 KTX를 타고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갑자기 A의 머리에 잔인한 생각이 스친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오늘 제대로 된, 살이 통통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만난 것이다. 

 

“저는 내일 서울에 올라갈 생각이에요.”

“오늘도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B는 쾌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젯밤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극적이게 그녀를 자극했지만 계속 그녀를 배려했었다. 하지만 A에게는 아무런상관이 없었다. 그 쾌활한 말투와, 하룻밤의 관계 연장을 원하는 그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A는 어제와 다른 태도로 무뚝뚝하게 식빵 두개 사이에계란 후라이를 넣어 먹는다. B는 눈치를 보며 어물쩌물하다가, 


“아, 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명함을 내민다.  

‘XX 상사’

‘B 사원’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5  


 B는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 금요일의 연차와 주말로 그는 그곳에 여행을 온 것이다. 잠깐이나마 많은 것을 내려놓으러 갔지만, 부푼 마음을 안고 기차에서 카톡을 한다. 그는 자신이 그리던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다. 그녀는 아침을 먹을 때의 시큰둥함을 제외하고는 계속 B를 따듯하게 대해줬고 하룻밤을 더 허했다. 같이 장을 보고 저녁을 해먹고 같이 밤바다를 걸었다. 그녀의 왠지 모를 슬픔 눈을 보며 평생 이 여자를 지켜줄 것이라 섣부른 다짐을한다. 기차역에서 배웅을 하는 그녀가 손 흔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그는 베시시 어린 아이처럼 웃는다.

 A는 다시 혼자 남았다. B를 기차 승강장에서 웃음으로 보낸 후 한 숨 돌린다. 맞지 않은 옷을 입고 하루를 불편해 하다가 옷을 벗고 욕조에 누운 기분이다. 그녀는 담배를 한대 핀다. 역에서 마을까지는 꽤나 멀어 역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내린 뒤 택시를 잡아 탄다. 택시 기사는 여행을 왔냐, 혼자 왔냐 별별 질문을 다 하지만 그녀는 무시한다. 라디오 소리가 시끄럽다. 그녀는 잠깐 과거의 기억으로 스며든다.

 유럽에서 만난 그 남자와는 3년을 사귀었다. 이기적이고 마초적인 남자였지만 “그래도 귀여운 면이 있어.”라며 자신을 위안시키며 관계의 3년을 지켜왔다. 싸움의 원인은 항상 A에게 있다고 그 남자는 말했었다. 감정 표현이 적은 그녀의 성격과 연애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그녀를 성적 묘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어쩌다 한번 본 카톡창에는 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면했다. 항상 화를 내는 쪽은 남자였고, 매번 주눅드는 쪽은 여자였다. 매달리진 않았지만, 그녀는 항상 그가 그녀를 떠날까 봐 무서워했다. 그러다 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대화에서주눅든 쪽도 역시나 A였다. 그는 가끔 당해온 손찌검이 무서워 맘 속의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 헤어진 날 밤에 그녀는 친구와 술을 마셨다. 


“미친 새끼 아냐?, 확 쌍욕을 하지 그랬어.”

 

 그녀의 절친이 말한다. 자신은 그 남자가 안 그래도 끔찍이 싫었다고, 몇 번 너에게 말하다 결국 포기하고 너랑 인연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고 말이다. A는 말이 없다. 그 때 그녀는 처음으로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스물여덟의 여자가 담배를 처음 시작하기엔 충분한 스트레스였다. 술집 밖으로 나가 친구 담배를 뺏어서 한숨 들이킨다. 기침이 나온다.  


“씨발놈” 


 그녀가 말한다. 평소에 욕 한번 하지 않던 그녀가 욕을 하는 것을 본 친구가 놀라기도 전 A는 한번 더 욕을 한다.


“씨발놈, 씨발놈이라 한번 못해봤네.” 


 마을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후 방에 들어가자 깨끗이 정리된 거실이 거슬린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옷을 아무데나 던져 놓는다. 전화가 온다. B다. 그녀는 핸드폰을 소파에 던진다. 그렇게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 깜박한 듯이 다시 핸드폰을 줍는다. 아직 벨소리가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귀에서는 B가무어라고 떠들어댄다. A는 대충 흘려 들은 후 말한다. 다정한 목소리로. 


“저도 보고싶어요.”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A는 차창의 커튼을 내린다. 어느새 여름이 가까이 다가와 햇빛이 강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마을의 성수기는 역시나 여름이라 번잡하고 시끄러워 눈이 찌푸려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마음을 쉴 수 있던 조그만 마을에는 밤마다 폭죽이 터지고 아침의 백사장에는 맥주캔이 널부러져 있다. 해안가에 가까운 그녀의 집에서는 폭죽 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그녀는 이 성수기가 싫다. 그녀의 사냥감들은 대체로 비수기에 온다. 대도시의 고된 시끄러움을 벗어나 땅끝에서라도 마음을 뉘고 싶은 사람들. 혼자 여행 가방을 가볍게 하고 온 사람들이 그녀의 표적이다. 성수기에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땅끝에서도 치열하다.

 서울에 도착해 오랜만에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 뵌다. 아내를 떠나 보낸지 5년이 지난 그는 서울에서도 꽤나 좋은 요지에 주유소를 하나 차렸다. 출세 가도를달리며 멋을 부리던 그의 낙은 이제 손자들의 재롱이 전부다. A의 언니는 4년 전 결혼을 해 벌써 애가 둘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쉽게 적응하고 발맞추는 그녀는 대기업의 차장까지 올라섰다. 남편 또한 회계사로 잘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다 바쁜 관계로 A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었고그는 그것이 꽤나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나이와 성장 배경에 비해 가부장적이지도 않아 딸 둘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A가 서울로부터 떠난이후로 그녀는 언제나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래서 언제 올라오니?” 


 아버지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몰아부침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도록 말을 잘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벌써 일년만이야, 아무리 내려갔어도 명절에는 얼굴 좀 봤으면 좋겠구나.” 


 A 역시 마음 한 켠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부모에게 무뚝뚝한 딸이 되어버린 그녀는 별 말이 없다. 아버지는 같이 근교에 있는 아울렛에 가자고 그녀에게 말한다. 옷이 너무 추레하다고, 옷 한 벌 사주겠다는 그의 말에는 그저 사랑하는 딸과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과 도시의 삶에 대한 미끼를 던지는 마음 역시 깃들어 있다. 그 마음을 아는 A도 마지못해 승낙한다. 


 “곧 올라올 것 같아요.” 


 아울렛에 가는 차 안에서 그녀가 말한다.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한다. 아버지는 장녀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기에 똑같은 단지에 집을 구하는 것은 어떨까묻는다. 동시에, 


 “너가 정 불편하면 다른 곳에서 살아도 좋지. 말만 해주렴. 내가 뭐를 못해주겠니.” 


 A는 차창 너머를 바라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A를 그녀의 아버지 집에 내려다주고 B의 집으로 돌아가는 운전 길에서 그는 환희에 차있다. 오늘 그와 그녀는 누가보기에도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서울에서그녀를 만나니 기분은 더욱 색달랐다. 그녀의 사랑이 서울에서도 유효하다 생각을 하니 관계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진 느낌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와 가족이 되는 상상을 벌써부터 한다. 가족에 대한 안좋은 추억들이 많은 그는 역으로 가족에 대한 판타지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대학을 들어간 후 바로 이혼했다. B가 학생일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자는 부모님의 합의 때문에 있던 일이다. 사실 그도 그 합의를 알게 모르게 느껴와서 그는더욱 더 공부에 몰두했다. 그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대학에 가 부모님을 만족시키면 둘의 관계가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그가 더이상 좋을 수없는 대학에 간 후에 바로 깨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열심히 공부했다. 연애도 열심히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기 바빴다.


 20대의 연애가 그렇듯, 가족에 대한 판타지로 가득 찬 남자의 연애가 그렇듯 그는 상대에게 집착했다. 관계를 한번에 부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금이 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의 계속되는 집착은 그릇이 깨지도록 만들었다. 그는 어떤 남자가 보기에도 좋은 남자였지만, 그의 여자친구들은 헤어진 후항상 그를 부정했다. 착하고, 듬직한 남자친구 였을지는 몰라도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집착은 폭력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욱 더 헌신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관계를 그르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그는 상대에게 계속 부담을 주었고, 과정에서 항상 착한 사람은 B, 나쁜 사람은 그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미래를 꿈꿨던 두명의 여자는 모두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다.

 하지만 B의 타고난 성실함은 그가 실패에서 교훈을 얻게 만들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 마음이 한층 더 여유로워진 것 또한 이유였다. 가장 최근의 실패 이후 두번의 연애에서 그는 조금씩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갔고 집착 또한 줄어들게 되었다. 그는 과거 가족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그 실패를 자신의것으로 만드는 지를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낭만파였던 그는 조금은 더 현실적이 되었다. 최근 연애의 상대에게는 아무래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불우한 성장 배경에 있었다. B는 더이상 여성들의 그늘진 모습에 끌리지 않게 되었다. 맘을 주기를 애초에 거부했던 그 연애는 짧게 끝이 났다. 

 하지만 A는 달랐다. 그녀는 분명 그늘진 모습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불우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과거의 그녀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쫓기는 듯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와 시간을 보낼수록 점점 그렇게 느꼈다. A와 B사이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그는 생각하며 미소짓는다. B도 덩달아 한층 더 여유로워 진 것이다. 쫓기는 것이야 물론 항상 그의 일상이었다. 그의 성실성이 언제나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A를 만난후 그는 한적한 해안가에 눌러 앉은 것 같았다. 과거에는 답답한 사무실에서 잠시 나와 담배를 필 때가 하루에서 가장 맘을 쉬이 누울 때였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지만 그 시간들이 잠시 같은 요즘이다. 그의 마음은 항상 바닷가에 있다. 서울의 빡빡한 일상, 그것이 잠시의 시간이라 느낄 정도였다. 서울은 몸을 해롭게 한다고 되내이며 가끔 담배를 피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그는 그녀에게 같이 담배를 끊어보자 말할까 생각하며 차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온다.   




8  


 복수, 복수가 A의 마음에 묻어있다. 그녀가 다시 움직이는 이유이다. 거짓 웃음을, 거짓 애정을 내보일 수 있는 근원이다. B가 처음 명함을 건네 준 후 A는 그를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 후는 쉽다. 그녀가 사냥감을 언제나 구석에 몰아넣고 먹어 치우듯이, 이번에도 어렵지 않다. 이번엔 아예 B라는 미끼로 그녀가 정말로 꿈꾸던 먹잇감을 끌여들일 작정이다. 그녀에게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선물했던 그 남자. A가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 벌벌 떨게 만든 그 남자를 먹어 치울것이다.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B와 A가 같은 회사이니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사실 그녀는 그 회사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있다. B가 그를 알고 있을 확률은 극히 낮지만 그녀는 낙관적으로 계획을 설계한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땅끝 마을의 불행이라는 드라마를 선물해줬다. 이제는 그녀가 그에게 시네마틱 클라이막스를 선사해줄 시간이다.

 그렇게 그녀는 B에게 거짓 애정을 주고 있다. 사랑을 얘기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정도가 적당했다. B가 애정에 목마른 사람이란 것을 정확히 간파한 그녀는 딱 갈증을 가시게 할 만큼 적당량만큼의 애정을 투여했다. 그의 A에 대한 사랑은 점점 커져갔고 그녀는 그것을 느꼈다. 짧은 기간동안 그녀는 서울을 두번이나 방문했다. 그녀가 지방에 내려온 4년동안 일년에 한번 꼴로 올라갔던 것과 비교하면 꽤나 큰 변화였다. 반면에 그는 금요일 저녁마다 마을에 내려와 그녀와의 시간을 보낸다. 이정도의 치우침이 좋았다. 하지만 B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지며 미래를 이야하기 시작한 후 그녀는 부담감과 죄책감을느끼기 시작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녀가 세번째로 서울에 올라왔을 때, B는 일찍 퇴근을 하기로 맘먹었으나 갑작스레 회식이 잡혔다. 보통이라면 바쁜 일이있다고 둘러댔겠지만 그 날은 부장님이 특별히 꼭 참석을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남게 되었다. 그는 미안하다며 A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킨다. 회식이 있다는 말에,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쩌면 그 남자와 B가 같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오늘이 기회이다. 그녀는 어떻게해야하나 머리를 굴린다. 두어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B에게 전화를 한다. 


 “회사 사람들이랑 있어요?”

 “네… 미안해요, 조금 취했어요.”

 “괜찮아요, 내가 가서 집에 데려다줄까요?”

 “아니에요 그게 무슨 민폐람…” 


 A는 기회를 엿보지만 밑도 끝도 없는 작전이란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그 남자를 알지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심지어, 만나서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상황이다. 그러던 와중에 수화기 너머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B, 여자랑 전화하지 너?” 


 그다. 그 남자다. 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확연히 알겠다. 그의 거친 신음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A는 살짝 움츠러든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B에게 어디냐고, 취한 것 같으니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재차 말한다. B는 머뭇거리다 승낙한다. 


 그 남자와 마주쳤을 때, A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B가 자리한 곳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수십가지의 복수 방법들을 생각해 봤지만 그를 마주친 순간 다 허사였다. 그 남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마을을 다녀간 모든 남자들이 그랬을 것이다. 취한 B가 꼬부라진 혀로 보고싶었다며 그녀의 품에 안길 때 그의 어깨 너머로 그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A와 B 쪽에 눈길 한번 주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아니, 시선을 피하고, 몸을 숨긴다. 무섭다. 그렇게, 씨발놈이라고 한번 못해봤다.  





 A와 B는 이자카야에 왔다. A는 그에게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사주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하지만 술 한잔 더하자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는 사시미를 깨작거리며 말한다. 


 “알아요, 나 사랑하지 않는 것.” 


A는 말이 없다. 


“A씨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아요. 그런데~ 좀 이상하단 말야. A씨는 날 보는 것 같지 않아.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딘지 딴 데를 보고 있는 것 같단 말야.”

“그래도 난 자신 있어요.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고요.” 


A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제가 말이에요, 뉴욕에 갔었어요. 대학교 때, 뉴욕에 놀러 갔었어요.. 2년 사귄 여자친구를 서울에 두고 갔었다구요. 가기 전에도, 얼마나 애절한지… 여자친구는 공항에서 나를 보내며 울음까지 울었단 말야. 고작 10일인데! 나도 눈물이 맺히더라니까. 그렇게 같이 있는게 소중했었다구요. 호텔에서 누워도, 맛있는 것을 먹어도 걔 생각만 그렇게 나더라니까. 권태기가 지났다고, 다시 사랑에 불이 붙었다고 생각했어요. 엄청 외로웠어요. 왠지 모르게… 제가 살다 보니까삶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외롭게 만들더라고요. 외로운 거, 혼자여서 외로운 거, 그거 아무것도 아냐. 보고 싶어서 외로운 게 더 슬프더라구요. 새벽에 전화하고, 공연장 가서,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보며 동영상 찍고 걔한테 막 보내줬지. 그런데 걔는 내가 돌아오기 전날 헤어지자 했다니까요. 다른 남자 생겼다고. 울면서 말하더라.” 


B는 한잔 더 들이키며 말을 이어나간다. 


 “울긴 왜 울지? A씨는 이해가 가요? 남자 생겼으면 기뻤겠네, 나 같은 쫄보 안만나도 되고… 그러면 웃으며 말하지? 공항에서는 왜 또 울었냐 제가 서울에서 만나서 또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또 울데, 뭐하자는 건지… 근데 말이에요. 저도 울었어요. 미안하다고, 막… 미안하다고. 잡지 않았어요.” 


A는 드디어 입을 뗀다. 


“그래서 말하려는 게 뭐에요?” 


 그녀는 놀란다. 자신의 맘 속 깊은 곳에서 질투가 느껴진다. 필요 없는 감정인 동정심마저 생긴다. 몇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A는 ‘애정?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비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난 요즘 더 외로워요. 그 때보다도. 방금 자리에서도 저 혼자 술 들이켰다니까요.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처음엔 회식 때문에 못봐서 맘이 아렸는데, 갈수록 생각났어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에요. 난 이렇게 A씨를 사랑하는데…

”그런데 이리로 오겠다는거야! 너무 행복했지… 너무 행복했어요. 조금 후 멀리서 A씨가 걸어오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은거야. 그래서 달려가 안았는데, 달려가 안았는데… 당신이 없더라니까. 내 품에 있는데, 내 것이 아니었어. 내게 안기지 않았어요. 왜? 나는 분명히 당신을 안았고 당신은 나에게 안겼는데… 왜 그랬지… 도대체 왜…” 


B는 한동안 말이 없다. A가 말한다. 


“미안해요.” 


 B는 머리를 테이블 밑으로 숙인다. 

 그의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그를 눕힌다. 거의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일어나려던 A의 손목을 잡고 말한다. 


 “A야”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줘.” 


 A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10  


 다음날 B가 일어나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A의 차가운 시체였다. 마치 그림처럼, 그녀가 팔을 담근 욕조는 새빨갛다. 그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질끈눈을 감는다.  




11  


 예의 그 땅끝 마을로 B가 내려온지 어느덧 보름 째다. 그는 꿈을 꾸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꿈에서 그는 항상 바닷가를 걷는다. 그 꿈에서 그는 항상 크디 큰소라를 발견한다. 몸을 굽혀 잡고, 흔든 후 귀를 기울인다. 소라에선 언제나 같은 노래가 나온다.  


보통을 살았답니다

겨우 만족했는데

겨우 만족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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