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에 날리는 서정(抒情)
따뜻하다. 새하얀 눈이 쌓인 추운 설국임에도 이렇게 따듯한 기운을 150여 쪽의 서사동안 풍기는 이 유는 무엇일까. 두 남녀의 사랑이 있다. 아름다운 문체가 있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불의 여운 또한 이유가 된다. 결국 책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핵심은 사랑 이야기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현실은 눈 위에 덮힌다. 오직 둘의 사랑만 눈 위에 오롯이 필 뿐이다.
결국 이 책의 사랑의 핵심은 외면에 있다. 아내가 있는 시마무라는 게이샤인 고마코와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고마코도 이를 안다. 그녀도 그를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고 싶어할 뿐이다. 시마무라의 방식은 다르다. 현실이 세워둔 벽의 원인은 그에게 있다보니, 그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둘은 외면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고마코는 현실을 외면하려하고, 시마무라는 사랑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그 공통점의 자그마한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 시마무라에게 설국은 그저 도락일 뿐이다. 도쿄의 삭막한 세상 속에서 잠시 도피하는 피난처이다. 하지만 고마코에게 설국이란 생활 그 자체이다. 그녀는 돈을 벌고 빚을 갚기 위해 여기저기 연회를 뛰며 웃음을 팔아야한다. 물론 그녀는 시마무라와 지내면서 하루를 잊는다. 하지만 시마무라는 곧 떠날 사람이고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고통이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 둘 사랑의 유한성(有限性)에 있다.
계절은 지나간다. 시마무라가 마을을 방문한 겨울엔 사랑의 현실은 눈발에 덮히지만, 눈이 녹는 신록의 계절, 시마무라가 고마코의 곁에 없는 시간에는 눈이 녹아 현실이라는 척박한 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 책의 아이러니이자 서정의 근원이 드러난다. 시마무라가 부재한 계절, 꽃이 자신의 미를 만개하는 그 계절에 둘의 사랑이란 꽃은 지게된다. 사랑은 아름답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는, 사랑이 있는 추운 겨울만이 그들에겐 따뜻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