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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Nov 29. 2020

기어코 경솔해지지 않기 위해

언제나 사랑 쪽으로, 여름의 빌라를 읽고

백수린 작가님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정식 단편집은 처음 읽어본다. 내가 읽어본 백수린 작가님의 단편은 '시간의 궤적'뿐이었는데 미묘한 틈을 잘 포착하신다고 생각했다.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이렇게 미묘한 감정을 캐치하시는 분이라면 나도 모르겠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왠지 잘 알아주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주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작가님이라고 슬며시 리스트에 추가해 뒀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 여름의 빌라라는 단편집은 표지부터 취향저격이었다. 왜 난 몰랐지? 이 책의 발매를? 했더니 예스 24에서 신간 소개로 본 기억이 났다. 그때도 표지가 취저라며 사서 봐야지 하고선 여태 잊고 살았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어본다. 휴-


내가 유일하게 읽어 본 시간의 궤적이 여기 실려 있다.


-시간의 궤적

-여름의 빌라

-고요한 사건

-폭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흑설탕 캔디

-아주 잠깐 동안에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이 중에서 시간의 궤적은 이미 리뷰를 썼으니 제외하고 나의 마음을 붙잡은 이야기는 표제작 여름의 빌라, 고요한 사건, 폭설, 아주 잠깐 동안에. 요렇게.


여름의 빌라는 우리가 관광지를 둘러보며 느끼는 미안함에 대해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관광지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이 이야기의 주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각자의 삶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거대한 나무가 사원을 뚫고 자란 폐허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향유하는 행위를 넘어 그 시선이 과연 어디로 옮겨 가야 하는지를.


p68.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폭력과 증오를 번갈아가며 느꼈지만 또 다른 폭력과 증오를 낳지 않고 아스러지게 그 시간을 견딘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지만 그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기어코 경솔해지는 것을 보며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상대의 삶을 이해하는 것. 그저 바라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자꾸만 아는 체하고 참견하고 조언이랍시고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야 우리는, 나는, 이불 킥하는 부끄러운 밤 하루를 추가한다.


p59. 낡은 팬티조차 없이 작은 보트 위에 앉아서 장난을 치던, 그을린 피부의 어린아이들을 보는 순간 부끄럽게도 나는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요.라고 고백하는 주아는 생각보다 힘 있는 인물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경계선에서 주저하고 있는 모습조차 명확하게 알고 있다. 늘 주저하고 있을지라도 그 모습을 나라고 아는 것 자체가 힘이라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메시지에 나는 힘을 얻는다. 왜냐하면 내가 늘 경계선에서 이쪽저쪽 살피는 사람이니까. 주아는 경계선에서 주저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양쪽 사람들을 더 잘 알아보며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 마지막까지 간직했으면 하는 기억은 그런 장면이 아니라 이런 것입니다.'라면서 그들의 손녀 레오니가 그어진 선을 지우고 새 친구를 맞이하는 장면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주아이니까.


여름의 빌라를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 모든 사람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을까, 신기했다. 내가 경계선에 있기 때문인지, 작가가 경계선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의 말대로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찬찬히 기록한 사랑의 방식 덕인지. 나는 마냥 고마웠다. 그리고 이런 세심한 글을 쓰게 한 섬세함과 사랑이 또한 부러웠으며 급기야 롤모델 삼아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고요한 사건도 여름의 빌라와 비슷한 결을 고 있는데 그와 조금 다른 색깔의 흑설탕 캔디도 매력적이었다. '흑설탕 캔디'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고, 자신에겐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p194) 그리고 손녀의 꿈에서조차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것임을 밝히는 존재로 등장한다.

203.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할머니의 이야기여서 좀 더 여운이 남는 것 같고 외국인과의 교류여서 어쩐지 속편하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는 아니지만 장차 할머니가 될 거니까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느라 여운이 남았고 외국인은 내 모든 삶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으니 속편했다. 하지만 파편적으로 아는 것 이외에 숨어 있는 더 많은 가치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보는 의미가 더해지는 작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덧붙여 본다.


p28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고, 이 소설들 역시 그런 믿음 속에서 썼을 것이다.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므로.


사랑 말고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믿기까지 그동안 해왔을 작가님의 수많은 노력에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이야기로 결국엔 사랑뿐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길 나지막이 나를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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