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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작 May 14. 2024

버튼만 누르면 글이 나오는 자판기

#오글완 (보고 있나, 브런치?)

  글을 쓸 것도 아니면서 습관적으로 브런치에 접속했다가 웬일로 메뉴 아이콘 위에 알림 표시가 뜬 걸 보고는 주책맞게 설레기 시작했다. 뭘까...? 새 글을 발행하지 못한지 한참 됐는데 누군가 뒤늦게 기존 글을 읽고 하트라도 눌러준 걸까? 어쩌면 새로운 구독자가 생긴 걸지도 모르지...! 그 짧은 순간에 혼자 김칫국을 마시며 잠시나마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던 나는, 설레는 민트색 점이 찍힌 종 모양 아이콘을 누르자마자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알림의 내용이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4월의 마지막 날 글을 발행하고 벌써 2주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4월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글을 발행했는데, 오래도록 새로운 글을 발행하지 않으면 이런 잔소리도 해주는 거였구나... 브런치 작가가 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은 햇병아리 처음 경험해보는 시스템이 일단은 신기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나에게 헛된 기대감을 심어줬다가 급 실망감을 안겨준 것에 대한 원망 + 기본적으로 ‘잔소리’를 들었을 때의 조건반사적인 반발심리로 그 잔소리에 대한 항변의 말부터 튀어나온다.

  “치.. 글쓰기가 운동과 같은 거라면 난 이미 오늘의 한계치를 초과해서 근육을 쥐어짰다구~ 매일 매일 생방 원고를 뽑아내는 것만 해도 충분히 벅찬데, 내일이 빨간날인 바람에 오늘은 이틀 치나 한꺼번에 썼단 말이야.” (빨간날 전날이 왜 더 바쁜지는 이전 글 참고)

  이렇게 볼멘소리를 쏟아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곱씹는다. 그렇다면 17년째 거의 매일 라디오 원고를 써온 나는 이제 글쓰기로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도 될 만큼 근육질이 되어있어야 맞는 게 아닐까?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은유를 은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따지고 있는 것도 우습지만, 사실은 그렇게 따져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매일 강제로라도 무언가를 써낸 시간이 정말 근육처럼 나의 어딘가를 단련시켜준 것만은 분명하니까. 사실 진짜 근육도 매일 꾸준히 운동한다고 해서 보디빌더처럼 눈에 확 띄게 불어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겉으로 티가 안 날 뿐, 우리 몸은 확실히 달라진다고들 하니까... (사실 난 운동을 꾸준히 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들 한다.) 그러니까 꾸준한 운동처럼 꾸준한 글쓰기로 단련되는 근육 역시 소위 말하는 ‘잔근육’ 같은 종류일 것이다.


  그래, 뭐 17년의 경력이 쌓였다고 천하무적 글쓰기 달인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니고, 여전히 나는 매일 채워야 할 빈 문서가 두렵고, 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 어딘가로 도망치고픈 고통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17년 전과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막연한 불안감 대신 그래도 작지만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 17년 전 ‘방송 시간까지 도저히 아무것도 안 떠오르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늘 기저에 깔 있었다면, 이제는 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감 시간이 임박하면 뭐라도 완성될 거라는 걸. 이건 나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마감의 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도 나름의 글쓰기 잔근육이 발달해서 이제는 몸이 아픈 날에도 아픈 증상을 오프닝의 소재로 활용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마치 자판기처럼.. ‘마감’님께서 다가와 버튼 하나 눌러주시면 뭐라도 글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나온 글이 핸드드립 커피처럼 깊은 풍미를 내진 못하겠지만, 후루룩 타낸 믹스커피도 꽤 많은 이들에게 소확행이 되어주지 않는가. 그거면 충분하다. 어떻게든 나에게서 뽑아져 나간 글이 어떤 이들의 순간에 믹스커피 한 잔 정도의 여유와 행복을 선사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이렇게 17년이나 글쓰기 노동에 시달리며 나름의 잔근육도 갖췄다 싶은 나에게 오늘 브런치 시스템이 건넨 잔소리는 오히려 신선하게 와 닿았다. 물론 처음엔 볼멘소리부터 나왔지만, 사실은 잔소리가 반가워서 최대한 정석적인 반응으로 잔소리를 잔소리답게 즐긴 것이라고나 할까? 생각해 보니 17년이나 ‘작가’라는 직함을 달고 살아오 한 번도 이런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잔소리를 듣기 전에 알아서 매일 매일 글을 뽑아내는 게 나의 일이었으니. 물론 잔소리보다 강력한 '마감의 압박'이 동력이 돼주었지만, 그건 냉정한 밥벌이의 세계에 따무서운 책무감이지 ‘잔소리’와는 결이 다르지 않은가. 누군가 내게 게을러지지 말고 글을 써보라고 종용하며 용기를 주는 게 새롭고, 고맙고, 행복해서... 나름 17년이나 다져온 나의 잔근육을 알아달라고 은근히 과시도 할 겸, 그가 건넨 잔소리를 소재 삼아 오늘의 근육단련을 완료해본다.

  "예예~ 버튼을 눌러주셨으니 뽑아드려야지요. 글 자판기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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