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체력 문제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승무원에는 '레저형 승무원'과 '생계형 승무원'이 있다고 한다.
돈을 벌 필요가 없음에도 비행이 너무 좋아서 일하는 레저형 승무원은 극소수인데 그들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비행 중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생계형 승무원이지만 비행이 적성에 맞아 즐긴다면 그것도 축복이다. 그들의 비행은 회사에도 개인의 인생에도 전혀 손해가 아니다.
비행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둘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괜찮다. 그들은 그만둔 뒤 기억이 미화되어(왜 그러는 걸까?) 비행하던 시절을 아름답게 회상한다. 비행이 적성에 맞고 너무 하고 싶은데 건강상의 이유나 육아, 이민, 지방으로 이사 등 다른 이유 때문에 그만둬야 하는 승무원들은 조금 안타깝지만 나쁘지 않다. 그들은 비행을 계속 그리워하다가 상황이 허락하면 다시 경력직 승무원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비행이 적성에 안 맞고 너무 힘든데 그만둘 수 없는, 그만두지 못하는 승무원들인데 이들의 상황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이들의 비행은 회사에서도 실적이 좋지 않고 개인의 삶에도 엄청난 마이너스다.
그렇다면 비행의 어떤 것들이 적성에 맞고 안 맞는데 영향을 주는 것일까?
대부분 서비스업이 그러하듯이 승무원은 불특정다수를 만나게 된다. 다양한 연령, 국적, 직업, 성격의 사람들이 여행, 비즈니스, 이민, 경조사, 유학, 도피, 호송 등 정말 다양한 이유로 비행기를 탄다. 그렇기에 때로는 언어의 장벽을 넘고 때로는 문화의 장벽을, 그리고 때로는 지나친 무례함도 극복해야 한다.
대부분의 승객은 평범한 여행객이고 운이 좋으면 유명인도 만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세계 각국의 어떤 빌런을 만날지 모른다. 진상의 손님으로 인해 현타가 와서 비행을 그만두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내 운이 나쁘지 않으리란 법은 없기에 나는 매 비행 승객들이 탑승하기 시작하면 늘 긴장했다.
물론 오늘은 또 어떤 손님을 만날까 기대하며 비행하는 승무원도 있다. 아는 어떤 선배는 해외 나갈 때 만난 손님과 친해져서 그 손님 집에 초대받아서 가기도 하더라. (아마도 그 선배는 그런 유쾌한 성격이라 나 같은 방어적인 후배와도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쉽게 내 사람을 만드는 사람, 정말 승무원이 천직이다.
비행을 시작하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넘도록 처음 보는 동료들과 같은 공간에서 비행하게 된다. 팀비행이나 그룹비행이 있긴 하지만, 늘 같은 팀, 같은 그룹 승무원들과 비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 팀과 그룹은 거의 매년 바뀌기 때문에, 몇천 명의 승무원 중 아는 사람과만 비행하는 일은 거의 잘 없다.
이럴 때 낯을 가리거나 말주변이 없으면 비행 내내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매 비행 혹시나 이 선배, 이 후배와는 잘 맞을까 이야기를 꺼내보지만, 연인을 만나기 위해 열 번, 스무 번 소개팅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며 나를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지. 괜히 어색한 공기를 없애고자 아무 이야기나 해보다가 싱글 혹은 얼마 전에 이혼한 선배에게 남자 친구나 남편 혹은 육아 이야기를 꺼낸 날이면 차라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비행이 나을 지경이다.
비행을 하면 할수록 나는 매일 출근해서 같은 사람을 만나는 직장인이 부러웠다. 출근한 뒤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스몰토크가 필요 없는 사이. 별일 없으면 '일찍 출근하셨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만 하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내 공간이 있는 내 존재를 아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성향차이로 오늘 비행에서 나와 맞지 않았던 선배를 다음 비행에서 안 봐도 된다는 것, 오늘 내가 한 실수를 다음 비행에서 아무도 알지 못한 다는 것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승무원 직업은 '9 to 5 출퇴근'이 아니기에 규칙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비행기 스케줄에 맞춰 출근 시간이 정해지기 때문에 근무스케줄이 일정할 수가 없다. 명절이나 공휴일, 휴가철에 쉬는 것은 개인이 필요에 의해서 연차를 신청하지 않는 이상 남의 일이다. 오히려 휴가 특수라 비행 편이 많아서 연차를 신청을 한다고 해서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스탠바이 스케줄을 받게 되는데, 이 스탠바이 스케줄 때문에 스탠바이 전후로는 다른 일정을 잡기 힘들다. 하루 전날까지 아니 당일까지도 내가 어디 비행을 갈지 모르고 대기하기도 하고, 갑자기 4박 5일 장거리 비행에 불려 가기도 하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비행근무를 하게 되면 하루 24시간의 스케줄도 일정하지 않고 한 달, 1년의 스케줄도 예상할 수 없다.
그래도 매일매일 색다른 하루를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런 불규칙한 스케줄이 오히려 반갑다. 그들이 말하는 이런 스케줄 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평일에 쉬는 날이 많다는 것과 아이러니하게도 명절에도 일을 한다는 것이다.
승무원은 밤을 새운 상태에서도 웃으며 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승무원 채용심사에 체력테스트를 하는 이유다. 불규칙한 생활을 하면서 비행에서 일정한 수준의 업무를 수행하려면 보통 이상의 체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비행을 시작하면 웬만큼 체력 좋은 사람도 생활리듬이 다 뒤틀려버리기 때문에 수면의 질이 처참히 떨어지고 아침에 일어나기도 밤에 일찍 자기도 어려워진다.
보통 승무원들은 한 달 근무시간이 적으면 70여 시간 많아도 100시간 정도라 체력이 도와준다면 정말 많은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체력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여가시간에도 잠을 자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자거나, 한의원에 가서 침이라도 맞거나, 마사지받고, 운동하고.. 결국 한 달 평균 80여 시간 비행을 하기 위해 잉여시간의 대부분을 소비하게 된다.
이런 피곤한 신체와 정신 상태가 계속되면 비행은 물론 일상생활의 질도 형편없이 떨어진다. 언제부턴가 나도 깨어있어도 깨어있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푹 잔 것 같지 않은 몽롱한 상태일 때가 많았다. 쉬는 날 대낮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도 나도 모르게 계속 하품이 나와 친구를 서운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체력이 좋은 사람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해외에 비행 나와서 투어나 액티비티한 체험들을 하지 않고 호텔에서 잠만 자는지, 왜 알람 소리를 듣고도 못 일어나 약속 시간에 늦는지, 밤비행에는 왜 평소보다 화장이 엉망인지.. 열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은 다 체력문제다.
일상에 규칙적인 루틴이 지켜질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많은 사람을 만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나 같은) 사람은 비행이 적성에 맞기 힘들다. 이건 노력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것들이다. 에너지가 낮은 사람일수록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하루를 예상 가능한 루틴으로 채우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매 비행 낯선 사람들로 인해 긴장을 하면 업무의 퀄리티는 당연히 떨어지고 함께 근무하는 동료와의 분위기도 서먹해진다. 이러한 긴장은 비행을 많이 하면 조금 덜해지는 것 같기도 한데, 겉으로 티가 덜 나는 것이지 본인에게는 여전히 스트레스여서 심하면 마음의 병이 생길 수도 있다.
승무원이 꼭 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본인의 성향이 이러하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비행을 해보니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고 싶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게 이득이다. 나처럼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승무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조건 체력이다. 체력이 안되면 비행을 즐길 수도 없고 비행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친절함도 체력에서 나오고, 안전도 체력에서 나오고, 예쁜 용모도 체력에서 나오고, 서비스도 체력에서 나온다.
승무원이 되고 싶다면, 혹은 지금 승무원이라면 무조건 운동부터 하라고 하고 싶다. 영어 공부도, 제2외국어 공부도, 바리스타나 소믈리에 혹은 응급처치 자격증도, 체력이 없으면 다 소용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