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첫째를 낳고 복직 한 뒤 가장 힘들었던 건 몸보다 마음이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동기가 잘 생각했다며, ‘네가 KTX 타고 대구 왔다 갔다 하면서 길에 뿌린 돈이랑 눈물이 얼마냐’라고 했을까. 돌 지난 아이를 대구에 있는 친정에 맡기고 나 홀로 서울에서 비행을 했다. 둘째를 가져 다시 임신휴직에 들어갈 때까지 약 3년 반동안...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비행을 가서 호텔방에 누우면 눈물이 났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멋진 곳에 가도 마음 한편이 먹먹했다. 쇼핑을 하러 가도 아이에게 사줄 것만 찾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몸이 부서질 것 같이 피곤해도 기차를 타고 졸면서 대구에 내려갔고, 어중간한 짧은 오프에는 시간이 없어 한국에 있으면서도 아이를 볼 수 없는 속상함에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 사이 15개월이었던 아이는 6살이 되어있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리겠다고 아이와 생이별을 하며 비행을 하는 것일까?
아이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비행은 점점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동대구역에 내려 집으로 갔더니, ㅇㅇ이가 도착하자마자 나에게 오레오 과자를 주었다.
할머니가 주신 과자가 너무 맛있어서 나에게 주고 싶어서 안 먹고 기다렸다고 한다.
'엄마, 진짜 맛있죠? 우유에 찍어 먹어봐요.'
눈물이 핑 돌았다. 쪼꼬만 한 아이에게 벌써 오레오를 쥐어준 친정엄마에 대한 원망보다,
처음 맛보는 이 달콤함을 나에게 나눠주려 아껴둔 아이에 대한 감동이 더 컸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우리 ㅇㅇ인..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이생에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걸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내게 이런 행복주심에..
ㅇㅇ이가 나를 많이 찾는다.
엄마 자꾸자꾸 보고 싶어.
매일 같이 있어줘.
엄마 매일 생각나.
말로 생각을 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ㅇㅇ이를 두고 서울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점점 무겁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그런데 이 시기가 지나버리면 더 슬프지 않을까?
핑크뮬리 때문에 전국의 사람들이 다 경주로 온 줄 알았다.
밥 먹는 것도 기본이 30분 웨이팅이고, 어디 주차 한 번 하려 해도 너무 힘들고..
그래도 ㅇㅇ이가 신나 해서 좋았다.
자기 전에 '엄마 다음 토요일에도 같이 놀러 가요'라며 종알대다가 잠들었다.
다음 토요일에도 대구에 올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침에 단풍잎을 주워서 다람쥐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꿈을 꾸었단다. ㅇㅇ이가.
내가 대구에 다녀가면 ㅇㅇ이가 더 보채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유치원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ㅇㅇ이 엄마가 다녀갔구나'를 아신다고.
우리 ㅇㅇ이 어떡하지..
(몇 년 전 첫째가 만3살(47개월)이었던 어느 달 다이어리에서 가져옴)
너무 착했던 아이..
'엄마, 내가 들어줄게요'라며 자기가 들면 꿈쩍도 안 하는 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낑낑대던 귀요미.
어떻게 시간을 내서 참석할 수 있었던 유치원 참관수업에서, 귀요미는 수시로 뒤돌아보며 나를 찾고 손을 흔들었다. 주변 다른 엄마들의 '어머, 쟤는 엄마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는 수군거림에 애써 눈물을 삼켰던 그날의 기억..
나처럼 지방에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같은 동네에서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는 경우는 많이 보았고 너무 부러웠다. 입주도우미 이모님을 구할까 싶기도 했지만 집이 좁아 입주도우미 이모님이 쓰실 방도 없었고, 그보다는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는 게 마음이 놓였다. 근처에 육아를 도와줄 친척이 있거나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당시 부모님은 도와주실 수 있는 만큼 다 도와주셨다고 생각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선택을 하라고 해도 어떤 선택을 해야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둘째가 조금만 더 빨리 찾아왔더라면.. 하는 아쉬움뿐.
둘째가 이렇게 늦게 찾아올 줄 몰랐고,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줄 몰랐다.
그리고 이제 둘째가 예전에 친정에 맡겼던 그 시절의 첫째만큼 자란 요즘, 함께 할 수 없었던 첫째 아이의 어린 시절이 너무나 아쉽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