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중독자의 커피성찰
난 커피 중독자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는 행복하지 않지만, 커피를 내리는 그 시간을 상상하면 행복해진다. 눈을 뜨자마자 자연스레 발길이 가는 곳은 바로 캡슐 커피 머신이다.
커피를 내리는 소리, 커피의 향기, 커피의 씁쓸한 맛, 뜨거운 커피, 얼음을 가득 넣은 커피, 우유를 넣은 커피… 난 이런 것들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커피나 차 등의 기호식품을 섭취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다.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커피의 쓴 맛이 싫어서도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 담배, 커피 등은 기호식품이다. 기호식품이란 필수 식품이 아닌 것으로 사람의 기호에 따라 섭취하게 되고, 먹어도 되지만 먹지 않아도 무방하기에, 꼭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기호식품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강력한 습관이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 나의 기호식품은 나의 습관이 된 것일까?
대학 입시를 앞둔 언니들 덕에 나는 커피 맛을 자주 보았다. 달달하고 시원한 커피맛이 꿀맛 같았다. 우리 엄마는 자지 말라고 커피를 타 주셨지만, 그 커피를 마시면 더 잠이 왔던 건,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우유를 많이 넣고 설탕도 많이 넣어서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엄마, 잠이 와서'라고 덧붙이면 되었다. 엄마는 하루의 일과가 다 끝이난 후에도 자식들을 위해 다시 부엌으로 와서 커피를 타서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커피는 고단함도 불식시키는 자녀를 위한 사랑이자, 대신 공부를 해 줄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인가 싶다. 저녁식사 후에 부엌에 다시 들어와 설거지하는 일은 정말 힘들고 귀찮은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다녔던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는 자판기가 그 역할을 대체했다. 하지만 자판기에는 엄마의 사랑은 없어서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그저 나를 위한 ‘위기의식’을 채우고 각성하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동전을 넣고 커피를 기다리면서 잠시 불안, 초초한 수험생활에서 벗어나는 작은 휴식을 가질 수 있기도 했다. 때로는 프림이 없는 검은색 커피를 뽑으면서, '설탕 마저 빼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곤 했었다. 그런 날은 없었다. 아마도 그런 선택을 했다면, 정말 제대로 공부만 하고 싶은 날이었겠지. 생각해 보면 커피를 두고, 한 모금씩 마시며 각박한 독서실에서 잠깐의 위안을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잠을 깨어주는 수단에서 잠을 깨야만 하는 로망의 커피로
내가 스타벅스를 알게 된 건 10대의 마지막 시절, 가족들과 미국에 가서였다. 로드아일랜드 주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1년 살이를 했는데, 그곳에는 버클리 대학교, RISD라는 디자인 대학교들이 주위에 있어서 다운타운에 가면 그 대학들 주위를 배회하며 나도 도서관을 이용하곤 했었다.
한 번은 큰 언니가 차로 데리러 올 때까지 한 시간이나 시간이 남아서 갈 곳을 찾아야 했다. 그때 발견한 곳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좁디좁은 카페에는 자리가 없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 책을 펴놓고 커다란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은 하나의 청춘 영화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커다란 커피 잔에 아메리카노, 혹은 라테가 듬뿍 채워져 있었다. 난 주문할 엄두도 나지 않아 그 자리를 나와 익숙한 던킨 도너츠로 갔던 기억이 난다. 던킨 도너츠에서 헤이즐넛 라테를 주로 마셨는데 헤이즐넛을 발음하기가 어려워 주문하기 전에 여러 번 연습을 하고 가곤 했다.
사실 그때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시킨 적은 1년에 2-3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가족들이 가서 마시기에는 비싸고, 가성비가 떨어졌다. 그래서 스타벅스라는 공간의 이미지는 굉장히 풍요롭고, 지적이고, 그리고 자유로운 그런 이미지. 그래,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이나, 멋진 금융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들러서 각자의 커피를 주문해 사가는 그런 곳이었다.
그때 내가 마주쳤던 그 사람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제 스타벅스에 밥 먹는 것보다 더 자주 들러서 커피뿐만이 아니라, 베이글, 케이크까지 먹고는 한다.
아이비리그도 못 갔고, 멋진 금융회사도 못 갔지만, 아이를 낳았고, 그리고 먹고살 만큼은 돈을 번다.
그렇게 보면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우애의 맛, 원두커피
미국에서 엄마는 그라인더(원두를 갈아주는 기계)를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다.
오븐에서 베이글을 굽는 냄새가 나면 옆에서 나는 언니가 그라인더에서 갈아놓은 원두를 커피메이커 안에 커피거름종이 위에다 살포시 얹었다. 그때의 그 향은 하루를 긍정하는 향이다. 그때 그 향은, 같은 하루에 다른 색을 입히는 렌즈와도 같았고, 내 후각을 아주 호화롭게 해서 평화롭게 만드는 진정제이기도 했다. 나는 특히 원두 냄새를 좋아했다. 뜨거운 커피가 조금씩 뚝뚝 떨어지는 시간 동안 오븐에서 베이글도 알맞게 구워져 갔다. 우리 여섯 식구는 베이글 반쪽에 우유, 그리고 커피 한잔씩을 나눠마시며 각자의 전투를 준비했다.
미국에서 1년은 우리 가족에게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나, 또 반면 각자에게 가장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삶에 토양이 되어주는 끈적끈적한 가족애자 전투애를 길러냈다. 우리는 각자의 같은 항구에서 정박해 있다가 각자의 대양으로 나가야 했다. 언어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고,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도 그다지 없을 때라, 그저 한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로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출항을 앞두고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커피를 나눠 마시며 우리는 다시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하루를 시작했다. 그 그라인더는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서 당시의 전투애를 새삼 소중하게 느끼게 해 주는 역사가 되었다.
연애를 하던 시절, 그때의 커피는 ‘핑계’였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은 그 사람과 산책하는 길이었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고, 커피를 마시고 오는 길은 두 손을 포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자의 고단함이 가난하지만, 젊고 서로를 생각하는 배려에 충분히 녹아내려가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한국도 아메리카노가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다양한 커피전문점이 생겨났다. 스타벅스를 닮은 커피숍도 생겨났다. 대형 커피숍이 공룡처럼 거리를 잡아먹었다. 그 공룡 속에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가 각자의 커피를 골라 시간을 샀다. 길거리에서 마시던 달고, 부드러운 커피보다 맛도 없었지만, 그 쓴 맛에 사람들은 많은 돈을 썼다. 점점 오백 원,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 오천 원으로 내가 살 수 있는 커피값도 올라갔다. 나는 나의 꿈을 좇았고, 나는 돈을 벌었다. 그리고 나는 첫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나에게의 일탈, 그리고 너에게의 일탈
아이를 놓고 나서는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커피의 맛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일이었다. 아이가 커 가면서 오분에서 십분, 십 분에서 삽시분, 한 시간 정도로 늘어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쓰는 글도 많아졌다. 때로는 일도 하고, 일기도 쓰고, 글도 쓰지만. 대체로 커피를 마시는 시간 동안 일탈한다. 내가 해야 할 일에서부터 탈출한다. 탈출해서 가는 곳은 바로 나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 그리고 바로 지금의 나.
'커피 한잔 할래?'는 이제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다.
그렇게 귀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나눠갖자는 말은 얼마나 큰 의미인가?
그 시간을 함께 할 만큼 당신이 좋다는 말이다.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것이고, 당신의 삶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이고, 그래서 당신이 좋다는 뜻이다.
머나먼 나라에서 온 원두들의 응원, 커피
이제 거동이 편하지 않은 엄마와는 집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래도 건강한 편인 아빠가 캡슐을 내리는 동안 엄마와 나는 아빠 칭찬을 한다. 앞으로 계속 커피를 내려달라는 뜻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가 잘 동안 커피를 내린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는 나의 의식이고, 나의 어떤 고민도 이 커피 앞에서는 다 고만고만한 지나갈 일들일음 되새긴다. 커피는 여기 내 곁에 있을 거다.
언젠가 나는 조금 더 자란 아이와 함께 커피를 마실 것이다. 예전의 나의 엄마처럼 잠을 깨라고 커피를 타 줄 것이다. 난 또 얼음과 설탕을 잔뜩 넣고 우유의 맛으로 건강도 채우겠지. 배불러서 자는 아이를 깨우지는 못할 것 같다. 사랑하는 친구들과는 아주 소담하고 정갈한 카페, 넓은 창가에 앉아서, 각자 취향이 담긴 커피잔에 커피를 담아 서로 마주 볼 것이다. 아마도 웃다가, 또 인상을 찌푸려가며 고민을 터놓을지도 모르겠다.
커피가 사라져 가는 동안 내 안의 근심도 결국 또 이해로 뒤덮일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약간의 위염을 달고 사는 대신, 나는 커피를 온전히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머나먼 나라에서 온 원두들이 내게 주는 응원과 희망은 생각보다 큰 의미였다.
그들이 주는 진하고 깊은, 쓰다고 응축될 수 있는 그 맛. 난 그 원액을 사랑한다.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진한 커피의 맛, 갓 내려 뜨겁고, 그리고 풍부한 맛. 거품이 약간 일어서 커피의 바다 위에서 파도처럼 겉막을 형성한 커피는 더 아름답다. 나는 오늘도 그 커피를 내리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깐 내 깊은 곳으로, 그리고 나의 지난 시절로, 미국으로, 첫사랑으로, 외로움으로, 가족으로, 행복으로.
그러니까 내 삶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다시 오늘에 정착한다. 커피 잔에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하루를 시작한다.
궁극적으로. 난 오늘 커피의 맛처럼 더 진하게 살아보려고, 내 진했던 삶을 다시 곱씹는다.
그리고 또다시 내일의 커피를 주문하며, 미지의 오늘로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