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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ver Young Oct 24. 2024

결혼 전 이야기

그 여자의 프러포즈


  굉장히 바람이 매서운 겨울이었다. 부모님과의 대화 이후 나는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답을 어떻게 하면 인상 깊고 멋들어지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다가 커다란 꽃다발+내가 그린 엽서+일식식당 예약을 만나기 며칠 전부터 부지런히 준비했다. 약속 당일, 최대한 급하지 않은 척 넉넉히 저녁 시간에 만나기로 했지만, 계획이 있는 나는 분초를 다툴 만큼 바빴다. 예약한 꽃을 찾고 엽서를 매단 꽃다발을 들고 식사할 식당으로 숨이 차게 달려서 미리 꽃을 테이블에 세팅했다. 그다음 다시 약속 장소로 달렸다. 내 옆을 걸어가는 이들이 모두 칼바람을 막느라 옷을 최대한 여밀 때, 약 2시간을 열심히  뛰어다녔던 나는 거의 한 여름 수준으로 땀범벅이었다.


 내가 이렇게 죽어라 혼자만의 마라톤을 하고 있을 때, 이 남자는 평소 우리가 함께 가던 카페에서 몇 잔 째 쓰디쓴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카페 앞에 서서 내가 한참 동안 숨을 고를 때도, 그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워낙 춥고 어둑한 날이라 내부에는 손님도 없어서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내 걸음걸음이 바닥과 부딪히며 마치 [내가 왔도다!!!!] 하는 모양새였다.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이 남자는, 안부와 함께 본론이 아니라 전혀 의미 없는 주제의 말과 시덥잖은 농담만 주르륵 늘어놓았다. [아.. 이거 빨리 이제 얘길 해줘야 하는데.. 왜 자꾸 조잘거리는 거야..]  게다가 카페 안에는 우리 그리고 앳된 바리스타뿐이었는데  이 늙은 커플에게 무심한 듯했으나 저 어린 바리스타가 우리를 향해 귀를 쫑긋하는 느낌이라 진지하게 말을 꺼내기에는  불편했다. 그 와중에 내 옆에 남자는 마치 이별을 단단히 준비한 듯, 앞으로 쓸 일 있을 때 마음껏 사용하라며 [이별 선물]을 한 아름 안겼다. 하...  안 되겠다..


[우리 이제 나갈까요?]

짐을 챙겨서 카페를 나선 나는 진짜 그 자리에서 [안녕-]을 말할 거 같은 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놈의 바람은 왜 이리 부는지, 가뜩이나 긴장까지 해서 턱이 덜덜 떨렸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난 앞으로도 오래도록 당신이랑 같이 가야겠어요. 역시 당신이 난 너무 좋아요. 그러니 나랑 같이 살자고요!!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갈까요?]

이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했다면, 분명 남자 주인공은 와락 여자를 안고 입을 맞추거나 격한 기쁨의 표현을 했을 테지만, 역시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그는 내 손은 꼭 잡은 채, 아니 내게 손이 붙잡힌 상태로 이 말을 듣더니 거의 가제트가 되었다. [고. 마. 워. 요.] 하면서도 그때부터 팔, 다리를 삐걱삐걱 움직이며 식당에 도착했고, 이미 놓인 꽃을 보더니 더 묘한 표정으로 뚝딱 거렸다.

'아니... 이 대답이 아닌가.. 좋단 거야.. 싫단 거야..' 식사 내내, 그는 로봇 같은 표정으로 밥을 먹었는데, 내가 음식을 집어주면 그는 호두까기 인형처럼 눈만 둥그렇게 뜬 채로 입만 움직였다. 왜 가제트라 했는지 이해가 되시리라..

본인 말에 의하면, 그는 당연 끝내자는 대답을 들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흥 쾌한 OK를 들으니 실감이 안 나서 잠시 혼이 나갔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 먹은 음식이 뭔지, 맛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식당에서 나오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세상 따듯했던 겨울 저녁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회피하듯 도망가지 않을 것이고, 설령 내가 잠시 흔들린다 해도 그는 단단히 나를 지탱해 줄 것이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두 사람이 똑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의 길을 향해 함께 걷는 진짜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날 건네준 엽서. 뒤에는 yes가 적혀있다)

(그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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