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첫 만남부터 2달 가까이 흘렀을 즈음, 그와 나는 서로의 애인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연인이 된 직후 꽤나 멋들어진 한식집으로 갔는데 어찌나 손을 잡을락 말락 옆에서 헤매는지 답답해서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잡을 거면 이제 이렇게 잡아야지!' 하면서 말이다. 뭔가 경험이 없는 쑥맥인가..이거 이 연애를 내가 적극적으로 이끌어야겠군..이런 생각이 잠시 맴돌았다.
그런데, 이건 나의 심각한 착각이었다! 손을 맞잡은 이후부터 그는 그간 막혔던 감정의 독이 터지기라도 한 듯이 내게 자신의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내게 보내는 문자메시지는 거의 시 구절 수준이어서 초반에는 읽을 때마다 도통 적응이 안 됐다. 굳이 요즘 유행하는 MBTI를 비유하자면 나는 크게 감정의 변화가 없는 T였고 그는 감성이 넘치는 F 여서 대체 어떻게 반응을 하고 답을 해야 하는지가 내게는 마치 과제 같았다. 내 손을 꼭 잡고서 사랑을 말하는 이 사람은 정말 만남을 거듭할수록 더욱 진지했고, 진솔했으며 말 한마디 쉽게 내뱉는 경우가 없었다. 이제껏 내 곁에 있던 그 누구도 이렇게 마음을 가득 담아서 말했던 경우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땐 그것이 소중한 부분인지 알지 못 했다. 어쨌든 그런 모습을 거의 매일 같이 마주하니 타인에게 일정 거리를 두고 쉽사리 진짜 정을 주지 않으려고 철벽을 쌓던 나도 언젠가부터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나니 그의 감성 가득한 말에 대한 나의 반응도 조금씩 다양해졌다. 대답에 대한 부담이 이제는 마음이 동해서 입 밖으로 나오고 종종 업무가 나를 짓누를 때면, 그의 메세지를 잠시 다시 읽어보고 혼자만의 짧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의 미지근하고, 일관적인 반응에 내심 섭섭했을 그는 나의 변화를 분명히 느꼈을지 모른다.
나를 정말로 빵 터뜨린 메세지는 바로 그의 회식 때 그가 술기운에 조금 취한 상태에서 내게 보낸 아주 길고 긴 소설 같은 메세지였다. 마치 그 문장은 예전 국어 교과서에서나 보던 낭만파 작가의 구절같았다. 게다가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자꾸만 당신을 더 보고싶어하고...그립고..' 하다 문장이 뚝 끊겨버려서 글쓴이의 의도일리는 없겠으나 꽤나 진한 여운까지도 남겼다. 이게 취해서 쓴 글이라니.... 나는 휴대폰 화면을 쭉 읽어내려가다가 정말 소리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 사람은 대체 나를 내 상상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사실은 화려한 말로 여러 사람들 만난 경력이 있는 꾼인건가!!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대단하다. 그렇게 '사랑'을 듣고 또 들었음에도, 심지어 취중에 하는 사랑의 고백 속에서도 감동보다는 이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열심히 계산 중이었으니 말이다.
사귄지 석 달정도 되었을 무렵, 그가 내게 농담 반 하지만 진담이 섞인 듯 '나랑 같이 결혼해요.'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까르륵 웃으면서 그저 웃어넘겼다. 내게 한 아름 꽃을 안겨주고, 내가 가고 싶었던 장소로 데려다주고, 좋은 음식을 사주고, 선물을 안기고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보기 위해 왕복 3시간이 오가는 거리를 운전하던 그는 지속적으로 넌지시 '결혼'과 '함께하는 미래'를 말했다. 6개월도 안 만난 사이에 이 무슨 급발진이지? 뭐가 그리 확고해서 나를 잘 알지도 못 하는데 쉽게 미래를 말하는 거지? 이 때부터 우리는 약간..비유하자면 창과 방패같았다. 그가 결혼에 대한 의사를 내비치면 나는 말을 요리조리 돌려서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처음에는 '장난이에요.' 하며 웃어 넘기던 그는 시간이 지날 수록 확신이라곤 없어 보이는 한 마리의 미꾸라지같은 나의 대답에 점점 생각이 많아졌고, 슬퍼지기도 했고, 답답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독하게 마음을 먹기로 굳게 결심하고 이 불확실한 관계를 확실히 할 계획을 세운다.
초 여름에 만난 우리는 어느 덧 첫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굳이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니라 몇 일 앞서서 식사를 예약했다. 분위기가 좋았던 레스토랑에서 하나씩 코스 요리가 서빙되었고, 디저트가 나의 앞에 놓여질 무렵, 시종 일관 고민이 많아 보였던 그는 어렵지만 단호한 눈으로 내게 말을 꺼냈다. '우리, 당신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서로 만나지 않고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해요. 한 달정도 난 당신을 보지 않을 터이니 그 기간 동안, 정말 진지하게 나라는 사람을 생각해보고 결론을 내려주길 바래요.' 두둥..
이 갑자기 뭔 소린가. 나를 안 보겠다니? 하루에도 수십번 연락하고 아침 점심 저녁 세끼 꼬박 먹듯이 통화하는 사람이? 결론까지 기다린다고??늘 대강 상황 모면식으로 넘기고 넘겼던 주제가 아주 대놓고 내 머리를 강타하고 나니 귀가 다 먹먹했다.
그는 진짜로 나를 집 앞에 내려주고는, 선물을 건네주고 오랫동안 안 볼 사람 같은 표정으로 세상 멍한 나를 남기고 휘릭 떠났다. 진짜 내 인생 최악의 겨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