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됐든지 간에 기간과 시간을 정해 놓고 매번 거기에 딱 맞추려고 하면 비록 습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압박감은 클 수밖에 없다. 그것도 부담스럽거나 하기 싫은 것은 더할 나위 없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예요.”
“응,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멍하니 지냈다.”
“아! 예.”
“…….”
“…….”
“…….”
“음... 그럼, 건강 잘 챙기시고 다음에 또 전화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신혼 초, 시어머니께 전화를 할 때면 늘 이런 식이었다. 나름 시댁에 미움 안 사려고 이틀에 한 번씩 시어머니께 전화를 했었는데, 진정 우러나지 않는 마음에 하루하루가 마치 지옥 같았다. 게다가 대화에 있어서도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나만의 일방적인 대화이다 보니 그야말로 썰렁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뚝 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화를 안 하는 날은 그다음 날 다시 전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전화를 한 날은 안도감과 그다음 날의 부담감이 함께 공존했다.
‘이틀에 한 번’이라는 기간과 ‘저녁 7시’라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그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전화를 매번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강박 증세로 나타나곤 했다. 하루하루가 숨이 막히고 답답했다. 내가 왜 사는지 전혀 삶의 의미를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전화 횟수를 점점 줄여나가다가 지금은 아예 안 한다. 다만 진정 우러날 때 편안하게 전화를 한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공부 습관이 아이에게 기본기를 탄탄하게 잡아주는 것도 있었지만 아이는 공부의 양을 떠나서 매일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큰아이의 경우, 매일같이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문제집 각각 1장씩, 한자 1개, 이틀에 한 번 사자성어 1개, 1주일에 한 번 시사토론, 그 밖에 영어 학원과 피아노 학원도 주기적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 압박감이 매우 컸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날 할 일을 빼먹거나 뒤로 미룰 경우, 일이 더 복잡해지고 나중에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어도 그날 할 일은 그날 끝내는 걸로 못을 박아버렸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명언을 난 아이에게 계속 주입시키면서 매일 공부 습관을 놓지 않게 관리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형성된 공부 습관도 어차피 중학교 사춘기를 기점으로 와르르 무너질 것을 왜 그리도 목숨을 걸었는지 가끔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여하튼 큰아이는 매일매일 해야 하는 공부로 인해 강박증이 생겼는지 자주 두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엄마인 나도 그랬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걸 엄마가 관리해줘야 하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할 일을 얘기해 주고, 감시하고, 체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 개인적인 일은 뒤로 미루게 되고, 그날 또 다른 일이 생기면 압박감이 가중되어 만사가 짜증이 났다.
“엄마, 나 오늘 친구 생일이어서 저녁 식사 초대받았어요.”
“응, 그래! 그럼, 몇 시쯤 올 건데?”
“아마 늦을 것 같은데요. 친구들이 저녁 먹고, 실내 방방 놀이터에 가서 놀고 싶대요.”
“그럼, 저녁 이후에는 아무것도 못하겠네?”
“네, 그럴 것 같아요.”
“그럼, 오늘 해야 할 일 지금 빨리 해놓고 가렴.”
“지금은 쉬고 싶은데……. 그냥 내일 하면 안 돼요?”
“그럼, 오늘 못한 것까지 해서 내일은 두 배로 더 힘들잖아.”
“어휴! 마음 편하게 놀지도 못하고…….”
“그럼, 시간 날 때마다 아예 많이 풀어놓든지. 하루에 겨우 1장씩 풀면서 빼먹으면 나중에는 얼마나 더 힘들어지는데 그래. 엄마도 옆에서 힘들어 죽겠어.”
매일 공부 습관이 벼락치기와 다른 것은 하루 공부 분량이 적은 반면 꾸준히 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는 점이다. 다만 시험 기간에는 그동안 공부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따로 시험공부할 필요 없이 그냥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이를 옆에서 죽 지켜본 결과 오히려 평소보다 시험 기간에 더 편안해했다. 적어도 시험 기간에는 매일 한 장씩 풀어야 하는 압박감은 없었으니까.
며칠 전, 중학교 3학년 엄마들 모임이 있었다. 그동안 가슴속 깊이 쌓아 놓았던 얘기 보따리를 폭풍 수다로 풀어내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주요 내용은 아이들 교육 문제, 사춘기, 우울증, 남편 얘기, 그리고 시댁 문제 등이었다. 그중 시댁 문제를 얘기하다가 어떤 엄마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유인 즉, 자신은 시댁에 안 간 지 4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전에 시어머니가 자주 안 온다고, 자주 전화 안 한다고 압박감을 엄청나게 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시댁과 등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엄마는 이런 얘기를 했다. “저도 1주일에 2번 전화를 드리는데, 그때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전화하기 전에는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끊고 나면 정말 안심이 되더라고요.” 이러한 상황이 언제 적 얘기인지 모르겠다. 다들 사는 건 똑같았다.
▼
“사실 딸아이는 초등학교 때의 매일매일 공부 습관이 중학교에 가서는 벼락치기 공부 습관으로 바뀐 경우다. 그러니까 난 매일매일 조금씩 하는 습관이 좋다고 판단했지만 아이는 시험 보기 직전에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벼락치기가 맞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기 기억보다는 단기 기억에 강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엄마가 아무리 좋은 습관을 강요해도 아이는 결국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간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