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영 Apr 28. 2020

사춘기 엄마 처방전

3-2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첫째 아이

 어쩜 이렇게 예쁠까! 첫째 아이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고 또 봐도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마치 조그마한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또 다른 세상에 내가 와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제법 눈도 정확히 맞추고, 자신의 몸도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듯 팔과 다리가 편안해졌다. 첫째 아이와는 충분한 모유 수유가 가능했던 탓에 더 친밀한 교감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면서 스스로 뒤집기를 시도하는가 하면 어느새 벌써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 씨, 아이가 몸을 뒤집으려고 해. 빨리 봐봐.”

 “그러게. 자, 조금만 더 힘내자 우리 아가. 조금만 더. 으랏샤!”

 “아이고! 이런 다시 제자리네.”

 “또다시 시도할 것 같은데? 그래, 그렇지. 조금만 더.”

 “와우! 곧 뒤집어질 것 같아. 조금만 더.”

 “야! 드디어 뒤집었다.”

 “장하다, 우리 딸.”

 

 드디어 뒤집기를 성공한 첫째 아이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배로 바닥을 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온 집안을 걸레로 닦듯 배로 청소를 하고 다녔다. 그 당시 아이의 옷을 보면 대부분 배 부분이 거무스름하고 많이 닳아 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무릎을 꿇고 기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했는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시기엔 아직 팔에 힘이 없다 보니 얼굴부터 바닥에 내리꽂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 이러한 아이의 성장 과정이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 입장에서는 무척 신기하기도 하고, 때론 웃다가 하루해를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무언가를 붙잡고 일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정말 신기했다. 이제는 더 높은 세상,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나 보다.  


 “어! 아이가 침대 다리를 붙잡고 일어나려고 해.”

 “그런데 아직 다리에 힘이 없는지 자꾸만 주저앉네.”

 “저러다가 어느 순간 일어나겠지 뭐∼”

 “아마 저도 답답할 거야. 빨리 일어나서 걷고 싶은데 뜻대로 잘 안 되니.”

 “빨리 걸을 수 있도록 보행기 하나 얼른 구입해야겠어.”

 “그렇게 해.”


 어느 순간, 보행기를 탄 아이는 각 방을 쌩쌩 달리며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하면서 무척 신나 했다. 가끔씩 벽에 심하게 부딪치면서 다시 튕겨 나오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는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매 순간마다 아이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내기 바빴다. 지금도 앨범에 끼우지 못하고 그냥 덩어리째 보관되어 있는 첫째 아이의 어릴 때 사진들이 서랍 깊숙이 어디에선가 곤히 잠자고 있을 것이다.


 보행기를 탄 지 얼마나 됐을까? 이제는 보행기를 의지한 채 걷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보행기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말은 곧 보행기를 빼도 아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측이 맞았다. 다만 의지할 게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점은 의지할 게 있을 때는 자신감이 생겨서 자기도 모르게 서서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의지할 게 없을 때는 두려움이 먼저 앞서다 보니 자꾸 넘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여하튼 아이는 곧 안정적으로 걷게 되었다.   


 “자, 예쁜 우리 딸 한번 걸어 볼까?”

 “그렇지, 한 발 한 발. 아이고! 잘하네. 조금만 더. 이제 엄마 손은 놓는다.”

 “우리 딸 아빠랑 잘 걷네. 그래 조금만 더 걸어보자.”

 “이제 아빠도 손 놓을 테니까 너 혼자 걸어야 돼? 자! 옳지 잘하네.”

 “와우! 우리 딸 혼자서도 잘 걷는데…….”

 “조금만 더 걸어보자. 파이팅!”

 “아이고! 조심조심... 꽈당...”


 아이들이 맨 처음 하는 말은 옹알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뭐라 물으면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듣고, 자기만의 언어인 옹알이로 대답한다. 물론 부모는 아이의 옹알이를 당연히 알아듣는다. 다만 남들도 알아들을 거라는 건 큰 오산이다. 그러다가 “엄마”라는 말을 가장 먼저 내뱉고, 그다음 “아빠”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서서히 일상적인 단어를 적재적소가 아닌 그야말로 아이가 갖다 붙이고 싶은 곳에 마구잡이로 갖다 붙인다. 그것마저 너무 귀여워서 충분히 용서가 된다. 그리고 곧 짧은 문장도 구사하기 시작한다.


 “딸아, 우리 김밥 싸서 먹을까?”

 “네.”

 “그럼, 넌 여기 의자에 앉아서 엄마가 달라는 거 좀 집어 줘?”

 “네.”

 “저기 단무지 좀 줘 봐.”

 “여기요.”

 “…….

 “…….

 “자, 이제 다 된 것 같다. 아빠한테 김밥 먹자고 하렴.

 “아빠, 우리 김밥 먹어자.”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그다음 단어, 문장 순으로 말을 구사할 때, 주변에 다소 말이 늦게 트이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첫째 아이가 한창 짧은 문장을 구사할 당시, 말로 제대로 표현을 못 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다른 엄마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마구 혼냈다. 그 순간, 그 아이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그 엄마는 창피했는지 아이 손을 낚아채듯 잡고 휭 하니 가버렸다. 안타까웠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될 텐데.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당시 그 아이가 받았을 상처가 훗날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빨리’를 좋아한다. 빨리 선행하고, 빨리 취업하고, 빨리 승진하고……. 그렇다면 빨리 퇴직하는 게 좋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 무언가가 빨리 이루어지면 그만큼 빨리 수그러드는 허무함도 있다. 나도 이제는 기다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달아 가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작가의 이전글 사춘기 엄마 처방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