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커도 너무 컸다. 목구멍 속 양쪽 편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크다 보니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곧바로 고열로 이어졌다. 그렇게 첫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감기로 인한 고열로 병원 응급실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보통 사람들의 체온은 36.5도이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열이 났다 하면 기본 37도, 38도, 최고로 올라갔던 때는 39도였다. 만약 39도에서 열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된다면 결국 뇌가 파괴되는 매우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아이가 펄펄 끓는 고열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마음이 짠하다. 사실 나도 10여 년 전에 폐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치료를 받기 전 37도의 체온이 1주일 동안 지속됐었다. 그 당시 1주일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거의 죽고 싶을 정도로 아무 의욕 없이 지냈다. 그 정도로 36.5도 이상의 체온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건강은 물론 정신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체온임을 그때 깨달았다.
아이가 2살 때, 남편 회사 모임에서 가족 동반 여행을 갔다. 집에서 출발할 당시 아이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터라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행 간다는 생각에 몹시 들떠 있었다. 우리 세 식구는 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이가 너무 힘들어했고, 열이 오르면서 계속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쯤 갔을까? 아이가 아프다 보니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솔직히 가는 도중에 아이가 이렇게 아픈데 굳이 여행을 가야 하는지 회의감마저 들기도 했다.
어찌 됐건 비좁은 차 안에서 겨우겨우 견뎌가며 부산에 도착했다. 아이는 여전히 축 쳐져있었다. 그래도 순간순간 열이 떨어져서 그런지 먹는 것은 거부해도 놀 때는 그럭저럭 잘 놀았다. 그 당시 여름이었고, 아이보다 4살 많은 언니가 있었기에 함께 바닷가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모래사장에서 모래 쌓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밤이 되면서부터다. 아이가 열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면서 아무것도 입에 댈 수 없었고, 더군다나 빈속에 약을 먹이니까 계속해서 위액을 토했다.
사실 가족 동반 여행이라서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같이 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없으니 아이의 열을 빨리 떨어뜨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아이의 열은 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씩 꿈나라로 빠져들고,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 셋만 그 길고 지루한 밤을 지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밤이 더 깊어질수록 아이의 열은 점점 더 올라갔다.
몸이 거의 불덩이 같았다. 옷을 다 벗기고 가제 수건에 물을 적셔 계속해서 아이의 몸 전체를 닦아 줬다. 얼마나 몸이 뜨거웠는지 물에 적신 가제 수건이 금방 미적지근해졌다. 남편은 아이의 열이 조금이라도 빨리 떨어지도록 옆에서 계속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행여나 누가 깰세라 조심조심 물을 받아다가 가제 수건을 적셨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으로서 항문에 넣는 해열제, 써스펜 좌약을 사용하였다. 그렇게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밤은 지나가고 있었고, 아이의 고열도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아이는 좀 어때요?”
“지금도 약간 미열이 있긴 한데, 그나마 다행히도 많이 떨어졌어요.”
“아이는 지금 자나 봐요?”
“네, 이제야 겨우 잠이 들었네요.”
“그나저나 피곤해서 어떻게 해요? 잠을 거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아이가 아플 때마다 늘 이렇게 밤을 꼴딱 새우게 되네요. 우리 부부의 운명인가 보죠 뭐∼”
“제 아이는 이렇게까지 고열로 아파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아이들 고열, 정말 무섭네요.”
감기가 무서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감기로 인한 후유증이 이렇게까지 클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이 같은 공포가 우리 가족에게 수시로 찾아왔다. 그때마다 도저히 집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불안함이 우리 부부를 병원 응급실로 향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아이가 2살 때부터 5살 때까지는 밤이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밤이 아니라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향하는 위급한 밤이었다.
한 번은 새벽으로 향하는 칠흑 같은 밤에 또다시 아이의 고열로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 집에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 주고, 아이스 패치를 이마에 붙여 그나마 열을 조금이라도 내리게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불에는 아이가 약을 먹고 토한 흔적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이제 겨우 갓난아기였던 둘째 아이는 “응애응애∼” 하면서 보채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2년 터울로 아이를 키워 본 엄마들은 그때 내가 어떠한 심정이었을지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 당시 불 꺼진 다른 집들과는 달리 우리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난 부랴부랴 준비를 한 뒤 둘째 아이를 등에 업고, 남편은 첫째 아이를 품에 안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도 직장 생활하느라 몹시 힘들었을 텐데 굳이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아이들을 돌봐 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아빠의 노력과 수고를 지금 훌쩍 자란 아이들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자리, 그게 바로 아빠들이다.
여하튼 응급실로 향했던 그때 그 기억들. 아이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던 우리 부부, 펄펄 끓는 아이를 품에 안고 뛰었던 남편, 축 처져 있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던 나. 그리고 내 등 뒤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덩달아 다급했던 둘째 갓난아기. 그렇게 우리 네 식구는 가족이란 한 배를 탔기에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늘 함께 하는 것이다.
▼
“한집에 살고 있는 가족이라는 구성원!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가족들의 관계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나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에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분명 아닐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랑하는 가족이 내 곁을 떠날 때, 그때 비로소 감당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오곤 한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가사의 어떤 가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