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과 기억에 대한 사유
"기억이라는 것은 희미해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순간 희미해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기록을 하는 것은 그 시점을 늦추기 위한 처방같은 것이다. 내 기억의 유효기간을 늘리기 위한, 나의 소중한 시간들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
내가 쓴 생각의 일부분인데, 이렇듯 나는 기억에 매달려 기록에 집착한다. 이런 나를 한방 먹인 책이 바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이 소설은 나이 듦, 기억, 그리고 후회의 감정을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사유한다. (가디언)
소설자체가 재미있지는 않았다. 매력 없는 주인공에 책의 중반부까지 일어나는 사건자체도 지루하다. 외국 소설이라 그런지 중간에 하이픈(-)이 많이 나오는데, 한국 글에서는 접하기 힘든 문장구조라 이것 자체도 나는 꽤나 신경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읽는 내내 내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지는 기억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이다. 시간과 기억에 대해 스스로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기록을 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전반적인 소재가 내가 생각하던 것들과 많이 닮아있어서 조금 반가웠다. 시간과 기억에 대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소설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내 생각은 20대의 생각이고 책은 60대의 토니 웹스터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그가 느끼는 감정은 ‘회한’이다. 시간이 흘러 그의 ‘기억’과 실제로 맞닥뜨린 ‘사실’은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는 한탄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내가 이렇게 일기로 기록하고 나의 20대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만약 40년이 흐른 후 나의 기억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떨까. 나는 결국 지금도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억이란 정말 부질없는 것일까? 기억을 위한 기록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말로, 소리로, 사진으로-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엉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서도 수많은 의문이 생겨났지만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책을 읽는 도중에도 일기쓰기, 글 쓰기, 사진찍기를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없어져가는 기록들을 보며 사라져갈 내 기억을 염려했다.
내가 아등바등 지키려 노력했던 ‘기억’이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칠수도,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를 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40년 후가 될수도 아니면 그보다 더 이를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런 일은 없을 수도 있다. 토니 웹스터는 책 속의 인물일 뿐, 내가 기억하기 위해 기록했던 것들은 우리집 어딘가에서 먼지만 가득히 머금고 있을수도 있다.
책을 읽고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기억’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부질없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나를 덮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맞이할 미래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나온 과거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기억과 시간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