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표백

표백사회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우리

by 민진킴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 이라고 불러.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 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 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위의 글처럼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한국사회가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그렇다는 점에서 표백사회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주인공은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자살을 선택한다. 생각하고, 글로 적었고, 행동으로 옮겼다.

주인공의 생각은 현재의 청년들이 많이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동은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뭐랄까, 안타깝고 불쌍했다. 연민이 느껴졌다. 명분을 가지고 자살을 선택하고, 어느 정도 그 뜻을 이루었지만 주인공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불쌍했다. 단순히 자살이라는 선택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책 속의 그녀를 담아낼 그릇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혹여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이 불쌍했다.

그러한 연민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로 옮아왔다. 이러한 책을 읽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안타까웠다. 이런 생각으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일테니, 책의 주인공보다는 내가 더, 우리가 더 불쌍했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희망적인 미래는 한 사람이 뚝딱뚝딱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보다 딱 스무살이 많은 작가가 그려낸 젊은이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함께 읽고 함께 고민하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엔 소설 속 인물들의 생각이 지금의 청년들의 생각과 너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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