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존재하는가
나는 책이 끝날 때 까지 소설 제목이 ‘죽어 마땅한 (Deserve to die) 사람들’인줄 알았다. 작가의 말을 읽고서 ‘죽여 마땅한(Worth killing) 사람들’인 것을 깨달았다. 살인자의 아이덴티티를 그 어느때보다 강조한 이 제목을.
책을 읽으며 릴리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져버린 느낌이다. 릴리에게 있어서 대화와 타협은 없다. 타인의 잘못을 이해하는 방식은 오직 살인뿐이다. 그렇다면 그 살인은 나쁜 것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뿐, 릴리의 기준에서 그녀가 저지른 살인은 당위성이 충분하다. 상대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면 그 상대는 ‘죽여 마땅한 사람’으로 변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여 마땅한 사람은 존재할까. 객관적으로 릴리는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이다. 자신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해서 죽여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나는 릴리에게 계속 빠져들었다. 릴리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나는 그녀의 살인에 대해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투성이 잔인한 살인마도 아니었고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벌을 받는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어차피 죽을 사람 조금 일찍 죽이는 것뿐이에요. 게다가 그녀에게 상처받을 많은 사람을 구해주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든다고요.
사람들은 생명이 존엄하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누군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자신을 향한 상대의 사랑을 남용한다면 그 사람은 죽여 마땅해요. 너무 극단적인 처벌처럼 들리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충만해요. 설사 짧게 끝날 지라도요.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경험이라고요.
읽으면 읽을수록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가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위의 두 가지 대목 모두 충분히 공감할 만한 말들 아닌가. 소설의 끝에선 그녀가 잡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숨 가쁘게 전개되는 소설을 읽으며 혹시나 그녀가 잡히지는 않을까 숨이 막혔다. 나는 왜 릴리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나는 살인자도 아니고, 살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타인과의 불화를 살인으로 해결하지도 않는데, 왜?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여러모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표현이었다.
난 후회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저지른 살인마다 이유가,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픈 까닭은 외로움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내가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
나는 무심코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릴리를 통해 벌하고 싶었을 지 모른다. '죽여 마땅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처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동 성폭력범이나, 연쇄 살인마같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릴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며 릴리에게 공감한 스스로가 소름끼쳤다. 여전히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릴리에게 있어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이해했던 나는 어떤 사람일까. 실제로 죽여마땅한 사람은 존재하는 걸까, 존재 하지 않는걸까. 참 찝찝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