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by 민진킴

1. 생생한 표현

나는 그의 소설이 좋다. 표현이 아주 생생하다. 잊고 있었던 감각 구석구석을 깨어나게 한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가려웠던 표현들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그래, 내가 겪었던 감정이 이거였어! 말로 혹은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들을 섬세하게 써내려간다. 가끔 다른 책을 읽을 때, 표현이 모호해서 '이게 무슨 말을 하는건가' 고민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추상적이고 실체없는 말 인 것 같지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의 감정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이미지에 대한 묘사도 섬세하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것은 소설 속 한 폭의 일본화이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소설속의 허구일 뿐인데 실제 그림이라도 된 듯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반 고흐의 그림이나 모네의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실재하는 것 보다 더욱 실제같은 그림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산 속의 깊은 집도 잘 떠오르고 , 그 집안의 구조도 잘 떠오른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런 유의 꿈이 있다. 연결 되지 않는 몇몇 조각이 교차하듯 나타나는 꿈. 조각 하나하나에는 나름대로 질량이 있지만 한데 얽히면서 서로를 지워버린다.





2. 멈춰버린 시간

그는 새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다, 옛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클래식을 사랑한다는 표시가 소설 곳곳에서 묻어있다. 이 소설은 80년대에 읽어도, 지금 읽어도, 그리고 20년 후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속의 시간들이 모두 멈춘 것 같다. 하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색하지도 않다. 그저 소설 속 흐름에 알맞게 잘 흘러 간다.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야.





3.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가끔 터무니없는 전개가 펼쳐지기도 한다. 이 무슨 뜬금없는 장면인가 싶다가도,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라는 문장 한마디에 개연성이 생겨난다. '뜬금없다'고 생각되다가도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또 설득력있다. 왠지 그런일이 일어났을 것만 같다. 생각해보면 되게 이상한데, 나는 또 순식간에 설득당한다.




4. 마무리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순식간에 빠져들때가 있다. 소설이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해서 두 세 챕터를 순식간에 읽고나면 나도 모르게 호흡이 조금 가빠질 때가 있다. 어마어마한 힘이다. 글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다니.

사실 소설 자체는 이전 장편들에 비해 그리 임팩트가 있지는 않았다. 용두사미라는 느낌이 조금 들긴 한다. 하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섬세한 그의 문장을 읽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충분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