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사람에 대한 단상-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
소설가 구보 씨는 걷는다. 생각한다. 존재한다.
구보씨는 산책자다. 1930년대의 경성 거리를 걷는다.
내면의 의식을 따라가며 걷는다. 그것이 창작 노트에 기록된다, 소설이 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는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유형이라고 꼽힌다.
모던해서 읽기 쉽지 않다.
그러나 참고 읽다 보면 구보씨를 알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져 걷고 있는 근대인, 구보 씨. 작가 박태원이기도 하다.
그가 ‘행복’을 찾아다니는 하루를 함께 걷다 보면, 1930년대의 경성의 풍경과 고독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는 구보의 내면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걸어보자.
구보는 스물여섯 살이다.
동경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작가이지만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못해 어머니의 근심을 산다.
구보는 한낮에 집을 나선다.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며 걷지만, 목적은 없다.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해 화신 상회 앞으로 간다.
구보는 승강기 앞에 서 있는 한 가족을 본다. 그 가족은 아마 식당으로 가서 오찬을 즐길 것이다.
구보는 그들이 자기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엿본다.
업신여길까 하다가 축복해주겠단다. 그들은 행복을 찾을 거라며.
그리고 자기는 어디 가서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한 손엔 단장과 한 손엔 공책을 들고 있었다. 그것이 행복을 줄지는 모르겠단다.
그는 전차를 기다린다.
전차 안에서
구보는 뉴스 게시판을 본다. 아마도 그 시절엔 전차 안에 뉴스 게시판이 있었던 모양이다.
파란 융을 받쳐댄 창에 축구나 야구에 대한 소식이 없다고 구보는 말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그는 요사이 고독이 두렵다고 말한다.
그때 “표 찍읍쇼” 차장이 다가왔다.
대정(大正) 12년. 11년. 11년. 8년. 12년. 대정 54년―.
구보의 손에 들린 동전에 적힌 숫자다.
구보는 그 숫자에서 어떤 한 개의 의미를 찾아내려다 부질없는 일이라며 어떤 의미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은 아닐 거라고 말한다.
이렇듯 구보는 외면과 내면의 풍경을 오가며 묘사한다.
그 시대 젊은 지식인의 내면이 평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안과 고독, 우울로 물들었다, 희망과 행복감으로 물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전차에 막 오른 여자를 본다. 구보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칠까 겁나 다른 곳을 보며 저 여자는 자신을 보았을까 생각한다. 여자는 작년 여름에 단 한 번 만났던 여자다.
기억할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다, 그래도 여자가 때때로 자기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가 우습다며 여자를 한 번 본 뒤로 일 년간 꿈에 본 일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러다가 만일 ‘여자가 자기를 진정으로 그리고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며 구보가 여자 편으로 눈을 주었을 때, 여자는 전차에서 내린다.
‘여자를 따라 내릴까,’ 구보가 망설거리는 동안, 전차는 달리고, 구보는 아차, 하고 뉘우친다.
행복은, 그가 구하려던 행복은 그 여자와 함께 영구히 가버렸는지도 모른다며 다시 생각한다.
그 무엇도 확실치 않는 스물여섯, 구보의 내면이 망설임과 두려움, 소외감으로 물드는 순간이다.
다방에서 경성역으로, 다시 다방으로, 카페로, 그리고 집으로
구보의 행복 찾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는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약간의 여행 경비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다방에서 나와 활력을 찾기 위해 경성역 대합실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더 큰 고독과 슬픔을 느낀다. 여자와 함께 월미도에 간다는 동창을 만난 탓이다.
이렇게 구보는 경성이란 도시를 산책하며 타인의 삶을 관찰한다.
상실감과 고독을 느끼며 다시 다방으로 돌아온 구보.
구보는 동경 유학 시절의 옛사랑을 추억하며 다시 찾은 다방에서 보험외판원과 대화를 나누다 속물성에 불쾌감을 느끼고 다방을 나간다. 그더라 다시 돌아와 기다리던 벗과 만나 술을 마시러 카페에 간다. 그의 배회는 새벽 두 시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앞으로는 좋은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구보씨의 하루였다.
구보 씨가 걸었던 경성 거리는 ‘생활’은 없었다.
그가 찾던 행복도 없었다. 구보 씨에게 행복은 ‘참말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구보씨와 함께 걸으며 이 시대의 ‘구보’씨를 떠올려 본다.
관찰하며 걷고, 생각하며 걷고, 글을 쓰는 근대인, 존재하는 구보 씨.
현대의 구보 씨는 발품보다는 손품으로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고 데이터로 변화를 감지하며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나 젊음이 느끼는 고독과 우울, 그 불안한 내면의 그림들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근대나 현대, 미래 또한.
구보씨와 함께 걸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