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끝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는 계절이다.”
[심오재일기] 2026.1.13.
노년은 선택의 계절이다
노인이 되었다. 국가 공인 정식 노인이다. 작년 5월 이후로 지공족(지하철 공짜 탑승족)이 되었고, 각종 백신 무료 접종 대상자가 되었다. 오늘은 폐렴구균 백신 주사를 맞았다.
동사무소나 병원에서는 나를 ‘어르신’이라 부르지만, ‘노인’이 맞는 말이다.
“겉모습이 젊어 보여도 이젠 노인이에요. 노화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퇴행이죠. 착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예순 살이 가까워지자 공연히 여기저기 아프고, 끊어지고, 멈추기 시작했다. 해마다 한 차례씩 입원 치료를 해야 했고, 주로 한양방 협진병원을 찾았다. 그때 담당의가 늘 저 말을 했다. 워낙 친절한 말투라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실감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5, 6년 전까지만 해도 멀게만 느껴지던 ‘노인’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서서히 일상의 언어가 되어 간다. 만 65세를 노인 기준으로 삼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적어도 70세나 75세는 되어야 한다고 우겨 보아도 소용없다. 제도는 언제나 개인의 체감보다 먼저 도착한다.
백신을 맞고 오랜만에 동네 산책에 나섰다.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던 산책길이었다. 그러나 작년에 몇 가지 일들을 겪고 난 뒤로 발길이 뜸해졌다. 하루이틀 거르다 보니 어느새 몇 달째 아득히 먼 길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을 오가는 일 외에는 집 안에서 책과 페이퍼들에 고개를 처박고 지냈다. 등과 목이 굽는 줄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도 몰랐다. 마침내 심장의 불평을 듣고서야 아차 싶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산책길에 나선 것이다.
한겨울이지만 오늘은 햇살이 따뜻했다. 추운 동네라 군데군데 아직 눈이 남아 있고 블랙아이스도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양지바른 곳은 거의 말라 있어 걸을 만했다.
아무리 추운 계절이라도 산책은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이 혹한 속에서도 나무들은 쉼 없이 하늘을 향해 서 있었고,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침엽수는 침엽수대로, 활엽수는 활엽수대로 전 존재로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오늘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을 실컷 올려다보았다.
헐벗었지만 곧게 뻗은 백양나무는 자기처럼 반듯하게 펴고 살라고 말하는 듯했고, 눈 위에 찍힌 들고양이들의 발자국은 춥다고 웅크리고만 있지 말라고 눈짓하는 듯했다.
나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튼튼해지고 더 많은 잎과 열매를 맺는다. 겉으로는 느려지고 속도는 줄어들지만, 그만큼 속은 단단해지고 뿌리는 깊어진다.
활엽수가 해마다 잎을 떨구고도 다시 잎을 내는 이유는 지금의 계절을 넘는 긴 시간을 믿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늘푸름은 겨울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겨울을 이미 통과한 생의 태도 덕분일 것이다.
길 한쪽으로 내려 쌓인 갈비를 밟으며 줄지어 선 소나무들을 바라보고 걷는다. 사람이 노년에도 건강을 유지하려면 자연, 그중에서도 노송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동에도 소나무가 늘푸른 빛을 유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왁스 물질로 코팅된 뾰족하고 단단한 바늘잎, 그리고 부동액 역할을 하는 세포액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가운 바람의 침투를 막고 표면적을 최소화해 수분 증발을 줄인다. 숨구멍은 잎 안쪽 깊숙이 숨어 있어 수분 손실을 한 번 더 차단한다. 광합성 속도 또한 아주 느려, 휴면에 가까운 에너지 상태를 유지한 채 겨울을 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나무는 겨울을 나기 전, 가지 안쪽의 오래된 잎들을 과감히 떨어뜨린다. 새로 난 잎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결단이 노송을 노송이게 한다.
버릴 것을 알고 남길 것을 선택한 존재만이 사계절을 견딜 수 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요엘 2,28)
노년은 쇠퇴의 시간이 아니라 깊어지는 시간이다. 이미 많은 것을 겪은 노인들은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가능한 궁극의 전망을 꿈꾼다. 젊은이의 환시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이라면, 노인의 꿈은 ‘끝까지 품고 가는 것’에 가깝다.
노년이 꿈을 꾼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다. 더 이상 환시로 달려갈 필요는 없지만, 끝까지 놓지 않을 방향은 이미 분명해진 상태— 그것이 요엘이 말한 노년의 자리이고, 노송이 서 있는 자리다.
소나무는 어쩌면 영생의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영생은 죽음 이후의 시간이기 이전에, 지금 이 생을 어떻게 견디고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잎의 왁스 코팅처럼 두텁게 옷을 껴입어서인지, 한 시간 반 넘게 찬바람 속을 걸었지만 견딜 만했다. 되도록 깊게 숨을 쉬고,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내 안의 낡고 오래된 것들은 차례차례 내려놓아야 한다.
추위 속을 걷다 돌아와 마시는 뜨거운 커피만큼 좋은 게 있을까. 전기주전자에 팔팔 끓인 물로 카누 바닐라 라떼 한 잔을 타고, 호밀빵 위에 샤인머스켓 몇 알과 에그 프라이를 얹어 탁자에 앉는다. 큰딸이 나를 보더니, 한 번의 산책만으로도 목과 허리가 단박에 반듯해졌다고 말하며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빵 위에 얹어준다.
뜨거운 커피에 차가운 아이스크림.
그 또한, 노년의 별미였다.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겨울 풍경(Winter Landscape)」, 1811, 베를린 국립미술관
– 눈 덮인 침묵 속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수직의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