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짐 인 항아리
임미옥
밤새
눈이 내려
항아리 머리 위에
소복이 쌓였다
한때는
된장과 고추장 품어
계절을 익히던 몸
지금은
속을 비운 채
묵직한 뚜껑 아래
빈 시간만 발효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놓은
둥글고 푸근한 짐
물항아리를 이듯
고요히 인 채
한겨울
미끄러운 적막을
조심조심 건너고 있다.
✍️ 시인의 노트 ― 「눈짐 인 항아리」를 쓰며
항아리에게도 계절이 있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아 여름과 겨울을 넘기던 시절이 있고, 그 모든 일을 끝내고 속을 비운 채 가만히 놓여 있는 시간이 있다.
지금의 항아리는 더 이상 무엇을 익히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뚜껑을 덮은 채, 빈 시간을 견디고, 고요를 천천히 발효하고 있다.
나는 이 항아리를 보며 자식들을 다 키워 보낸 노모를 떠올렸다.
손에서 일이 떠난 뒤 하루의 대부분을 기도로 건너는 시간.
말은 줄었지만, 존재는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계절.
눈은 그 항아리 위에 내려 짐처럼 쌓였다.
무겁기보다 둥글고, 부담이라기보다 위로에 가까운 짐.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지는’ 삶이 아니라 ‘이는’ 삶의 형상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 시에서 항아리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한겨울의 적막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