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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행복을 엿보다

by 미르

공원에서 어깨를 넘는 긴 백발의 머리를 마치 모델처럼 우아하게 늘어뜨린 여자분을 보게 되었다.

한쪽에만 자라는 새치 머리가 신경이 쓰여 염색으로 꽁꽁 숨기고 있는 나는 언젠가 흰머리 커밍아웃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길에서 보이는 긴 백발을 무심코 넘길 수가 없었다.


할머니라 부르기에는 아직 미안한 여자분은 역시나 흰머리를 가진 남편이랑 같이 공원의 음수대 앞에 서 있었다. 흔히 공원에서 보이는 음수대다. 뒤쪽의 버튼을 누르면 둥그런 포물선을 그리며 물이 나오는 구조이다.

버튼은 한번 누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물을 사용하는 동안 계속 꾹 누르고 있어야 한다.


물을 마시려면 한 손으로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손을 씻을 때는 좀 번거로워진다. 한 손으로 버튼을 누르고 다른 손을 씻고 다시 손을 바꿔 다른 손을 씻어야 한다. 잠깐 지켜보고 있는데 남편이 버튼을 꾹 누르고 여자분이 손을 씻는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여자분이 버튼을 누르고 남편이 손을 씻는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그 교체가 이루어졌다.


서로 별말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내가 누를 테니 네가 먼저 씻어라'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내가 너를 위해서 버튼을 눌러 줄 터이니 너도 나중에 나를 위해서 버튼을 눌러라'가 아니었다.

그저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레 자리 교체가 이루어졌다.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수십 년간 일을 해서 말도 없이 상대와 나의 위치를 알아채는 멋진 한 쌍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달인들의 모습이었다.

그저 손을 씻는 작은 행동 하나인데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있었다.

이번이 처음일 수도 있고 여러 번 습관처럼 이어진 행동일 수 있다. 처음이든 습관이든 서로를 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아주 짧고 작은 소소한 행복을 옆에서 슬쩍 엿본 기분이다.

한때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서 2년 정도 주말부부를 한 적이 있었다. 주말부부이기는 하지만 월요일 새벽에 가고 금요일 저녁에 돌아오니 남편의 공백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기에 주변의 아줌마들의 반응과 미혼 아가씨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아줌마들은 대체로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며 부러워한다.

아가씨들은 아주 안타까워한다. '서로 사랑하는데 어떻게 헤어져 살아요'라는 반응이었다.

그럴 때면 대답했다.

"앞으로 50년 넘게 같이 살 건데 2년 정도쯤은 금방이에요."


의료기술의 발달 등 여러 이유로 평균 수명이 길어져 결혼 생활도 아주 길어진다.

점점 길어지는 수명을 고려하면 아직도 같이 살 날이 50년 정도 남았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떻게 배려를 하며 평화롭게 살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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