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라 마트에 갔다. 옥상에 주차를 하고 매장으로 내려가려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갑자기 한 할머니께서 가방을 뒤적뒤적하더니 말한다.
"앗, 카드 안 가져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미소를 띠며,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을 한다.
할머니는 여전히 다급하게 가방 속을 뒤지며 안타까운 표정이다.
"가방을 바꿔 가지고 오느라 지갑을 깜박했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잘했어, 잘했어." 계속 말한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바꾸느라 지갑을 깜박 잊어버리는 일은 가끔씩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나도 가끔씩 그러하다. 그런 상황에서 옆에서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잘했어"라니? 갑자기 평범한 할아버지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아이돌의 '원영적 사고'를 할아버지가 알 것 같지는 않은 데 직접 실천하고 계셨다.
"우리 사고 싶은 거 구경 좀 하고 가면 되지."
이어지는 다정한 말에 할머니는 가방 속을 뒤지는 손길을 멈추고 그제야 표정이 편안해졌다.
엘리베이터 안의 불안, 초조의 공기가 안정과 평화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할아버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필시 평소에도 저리 다정한 말투로 주변 사람들을 마구 감동시키고 다녔으리라.
요즘 박찬욱 감독의 영화'올드보이'의 리마스터링 버전이 보인다.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과 더불어 집요하고도 잔인하고 처참한 복수의 끝을 다소 슬프고도 폭력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최민식이 분한 주인공 오대수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이유, 사설 감옥에 15년이나 갇힌 이유는 바로 자신이 이사를 가면서 내뱉고 간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여러 번 반복하지도 않았고 단 한 번 자신이 뿌리고 간 한마디의 말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인생이 바뀌고 집요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영화라서 다소 극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생각할 여지를 주는 영화였다.
나를 한번 되돌아본다. 내가 내뱉고 가버린 말 한마디에 다른 누군가가 아파하지 않았을까?
내가 무심코 한 말이 화살이 되어 다른 이의 가슴에 푹 꽂히지는 않았을까?
오늘 본 할아버지처럼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만드는 것은 그 다정한 말이었다.
행복하고 즐겁고 기분 좋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예쁜 말,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황스럽고 안타깝고 어쩌면 화가 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는 마음은 쉽게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정한 따스한 말을 건넬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