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가던 도서관의 독서모임 회원 모집공고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이때까지 독서모임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혼자 좋아하는 소설책들을 미친 듯이 읽어댔을 뿐 모임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는데 같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책을 빌리는 김에 문의를 하니 담당자가 지금 없으니 전화번호를 주면서 1시간 뒤 전화를 해 달라고 한다. 마음을 먹었다고 바로 되는 것은 없구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집으로 와서 빌려온 책이랑 오는 김에 장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1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1 시간하고 30분쯤 지나고 나서 이쯤이면 되겠지 싶은 시간에 전화를 한다.
한 달에 두 번, 첫째 주와 셋째 주 모임이다. 다음 주부터 바로 나오겠냐고 묻는다. 마음을 먹었지만 급작스러운 제안에 시간이 좀 필요하다. 다음 달부터 가겠다고 대답하니 그럼 자세한 일정은 카톡으로 알려 준단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마무리를 한다.
첫 모임 날이다.
처음은 뭐든지 좀 긴장이 된다. 입고 가려고 어제 열심히 세탁해 둔 원피스는 아침의 거센 비바람으로 바로 탈락이다. 비 오는 날 긴 원피스를 입으면 뒷자락이 펄럭이며 비에 다 젖는다.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굳이 시도하지 않는다.
다음의 선택으로 넘어간다. 단정한 흰 블라우스에 이 정도 비는 버틸 수 있겠지 싶은 베이지색 바지를 고른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가려는 찰나 베란다 창밖으로 요란한 빗소리가 들린다.
아, 버틸 수가 없겠다. 이 바지는.
시간이 없다. 원래 가까이 사는 사람이 지각을 많이 한다. 멀리서 이동하는 사람은 혹시 있을 변수에 대비해 좀 넉넉하게 시간을 잡지만 오히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거의 정해져 있으니 빠듯하게 움직인다.
여유롭다고 생각한 시간이 부족해진다. 급하게 비에 젖어도 그다지 표가 안 나는 검은 반바지로 바꿔 입고 적당한 윗옷을 찾는다.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 앞에 꾸깃한 티셔츠는 안 된다. 딸아이의 방으로 가서 옷걸이에 얌전히 걸려 있는 흰 티셔츠를 하나 슬쩍한다.
흰 티셔츠, 검은 반바지, 하얀 운동화. 그리고 검은 백팩까지.
50대의 나이에 맞지 않게 꽤나 발랄해졌다. 어쩌랴. 오늘의 날씨 탓을 해 본다. 다음모임에서 나이 먹은 자의 우아함을 보여줘야겠다.
너무 흰검 흰검 무채색의 인간인 듯해서 산뜻한 연둣빛 장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생각보다 거세지 않은 비에 안심하며 도서관에 도착해 2층 시청각실로 올라간다.
한 달에 2번 모임 중 오늘은 영화를 보는 날이다. 약속 시간보다 15분쯤 먼저 도착했는데 두 분이 이미 와 있다. 긴장된 첫인사를 하고 입구에 놓여 있는 다음 모임에 토론할 책을 받고 서명을 한다. 이어서 오는 회원들과 인사를 하고 독서회 운영방식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10시에 바로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드라이브 마이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단편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책은 예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러하듯 약간은 어려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에 집중한다.
상영시간이 179분, 거의 3시간으로 상당하다. 보고 있노라니 봉준호 감독 등 많은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낼 만큼 충분히 흡입력이 있다.
제목이 이해가 된다. 'I'가 아니라 'You'가 생략된 '내 차를 운전해'인지 알게 되었다. 이 영화의 기본 주제와도 잘 어울리고 있다. 혼자라면 선택하지 않을 장르의 다소 심각한 이야기이지만 같이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볼 만하다.
영화가 끝난 뒤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개 글을 읽고 각자의 의견을 나눈다. 같은 영화를 보고 생각이 이렇게 다양하다니 신기하다. 호불호가 강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 사방에서 친절한 설명이 날아든다.
10시에 시작한 모임이 1시 반을 훌쩍 넘기고 다음 모임을 약속하며 끝이 난다.
영화 상영 때 나의 앞자리에 앉은 분의 흰 카디건 등에 적힌 영문이 의미심장하다.
'It's time to connect.'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다.
이제는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