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와 상관없이 너의 길을 가려면
캐나다에 살면서 사물이나 현상 또는 말의 표현 등에 대한 나의 즉각적인 반응에 스스로 의아할 때가 더러 있다. 나의 관점에서 가끔 삐딱하거나 냉소적인 면이 발견될 때.
어느 여름 날, 아들내미의 야구 경기를 구경할 때의 일이다.
아들이 투수석에 섰는데 한 아저씨가 그러는거다.
"You know what to do, Sam"
원래 포지션이 아니지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번 던져볼 기회를 얻은거였는데 에미인 나는 우리식으로 '화이팅!'을 외칠 수도 없고 그저 민폐나 끼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며 지켜볼뿐이었는데, You know what to do? 저 아저씨 가뜩이나 쫄아있는 넘의집 자식한테 부담주시네 싶었다.
나중에 아이에게, "You know what to do라 그러니까 너 그때 되게 압박감 느꼈겠다야. 부담스러웠지 그지?" 하며 호들갑 떠는 나에 반해 전혀 압박감으로 들리지 않았단다. 그게.. 그런...건가?
'You know what to do.'가 왜 나에게는 '알지? 똑바로 해라아...(두고 보겠어. 제대로 못하기만 해봐라)'로 접수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매사 매서운 평가의 잣대로써 잘하고 못하고 뚜렷이 가르는 일이 중요하고 1등만이 기억되는 나 살던 옛 세상에서 알게모르게 내면화된 오랜 습성이, 뭘해도 'Good try'의 격려로써 배려하는 이곳 풍토에서 충돌하는 거라고 여기고 있다.
그 후로, 'You know what to do'라는 말은 당시 상황과는 관계없이 내게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이게 살면서 얼마나 중요한건지.
영화 '내부자들'을 보면서 내게만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었다. 못된 신문사 논설주간 이강희가 영화속에서 몇 번이고 말하는 이 대사.
"그럼요 회사의 방침이 분명한대요."
우리가 분명한 자기만의 삶의 방침 또는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살면서 덜 혼란스럽고 마음과 정신의 에너지를 덜 소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덜 괴로울 수 있을지 모르고, 남들의 그럴듯한 모습을 보고 잠시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덜 비관적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르는 그 '잘 사는' 기준 요건들로부터 덜 지배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요즘 뜨는' 이나 '요즘 핫한' 또는 '대세' 등등의 이런 말들은 어쩌면 개인마다 각기 다른 자기만의 '삶의 방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흔히 우리 사회 문제라고 지적되는 쏠림 현상도 마찬가지.
어떤 선택이나 결정, 상황에 처해서도 이강희의 '분명한 회사의 방침'과도 같은 무언가가 있어야 맨날 '샘플자료' 확보하기에 급급하거나 어둠속에 firework 쏘아대듯 막연하기만 한' 정보공유'를 갈구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좋은 것들로 셋팅된 여건이 아니어도 진정 의연한 'You know what to do'의 경지에이르려면, 어떠해야 자기다운건지 어떨때 만족스러운지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허면, 뭐 결론은 본의아니게 소크라테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