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캐나다에 오자마자 작은아이가 학교에서 스펠링 테스트를 했었나 보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 낯설고 무서운 언어의 뜻 모를 단어의 철자를, 선생님의 소리만 듣고 얼추 비슷한 알파벳으로 꿰어 맞춘 다 틀린 쪽지 시험지. 귀퉁이에 적힌 선생님의 코멘트 'good try'를 보고 난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 나는 그게 선생님의 위트인 줄 알았다. 맞게 쓴 건 하나 없지만 빈종이를 내지 않고 또박또박 뭐라도 쓰려 애쓴 정성이 갸륵해서 가차 없이 0 아래 밑줄 두 개 그어 내어 주는 대신 '대략 난감'을 돌려 말한 것으로 이해했었다.
그런데 그 후, 이 말은 꽤 많이 쓰이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들의 야구 시합 중, 팀에 민폐를 끼치게 될 상황에서 누군가 헛스윙을 하다 삼진아웃을 당하거나 뻔히 눈앞의 공을 놓치거나 하면 내 속에선 '아휴 저런 ㅂ...' 이 나오려는 찰나 동시에 어디선가 터져 나오는 소리가 꼭 있다. 'good try~'
누구보다 앞서 두각을 나타내고 무조건 이기고 보는 게 미덕인 풍토에서 오래 살았고 이에 비판적이었으면서도 무의식 중에 나 자신도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싶어 지는 순간을 여러 차례 겪고 나서야 아이들의 실수 투성이 'good try'에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하긴 뭘 어쩌겠나. 제 딴엔 잘해보려 한걸. 그걸 왜 그렇게 못했냐 다그쳐봐야 될 일인가. 실수가 두려워 아예 시도조차 안 하는 것보다 해보고 실패하고 그를 통해 배워가는 삶, 아이들은 자라면서 그걸 체험해 봐야 하지 않나. 법륜스님 말씀에 따르면, 아이가 자전거를 배울 때 많이 넘어지는 아이가 자전거를 곧 타게 될 가능성이 높은 법. 아이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동안 어찌 속 시원한 결과만 볼 수 있겠는가. 아니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그러한지도 모르지.
나는 이담에 묘비명을 'Good try'로 해볼까나. 탁월한 능력으로든 살신성인의 희생으로든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닌 바에야 그저 길가에 핀 들꽃 같은 인생엔 그것밖에 뭐가 있나. 내 깜냥대로 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good try 밖에는.
캐나다의 '국민 카페' 팀 홀튼이 연초에 하는 경품 이벤트 기간 중에 내게 가장 많이 걸리는 것도, 'try again'...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던 푸쉬킨의 말을 받아 나는 이렇게 말할밖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다만 good 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