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보약'이란 말이 있는데, 그 이전에 잠은 우리 육체와 정신 건강에 있어서 근본이 아닐까. 예전에 우리 사회는 잠을 참 등한시하는 사고가 있었던 것 같다. 꼭 수험생들에 해당하는 '4당5락'처럼 적게 잘수록 미덕인 것으로 여기는 풍조만이 아니라 '죽으면 평생 잘텐데...' 한다거나 인생의 1/3을 잠으로 다 허비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역시 왕년에는 잠을 참 등한시했었고 밤을 꼬박 새는 일도 허다했는데 젊을 때는 수면시간이 적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잠을 못자면 즉각 영향이 느껴진다. 육체의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지고 나아가 감정적으로도 예민해지고 부정적으로 된다.
그저께 밤근무를 하고 난 아침과 낮시간에 충분히 자야하는데 자다가 중간에 깬 이후 다시 잠들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누적돼 있는 상태인데다 그날밤 일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잠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의 초조함은 참 괴롭다. 그럴 때 툭툭 튀어나오는 이런 저런 생각은 부정적인 것이 많고 그것은 스트레스 상태를 더 강화시킨다. 딱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그만 포기하고 알람시간보다 일찍 일어났다가 그냥 출근했다. 뭔가 날이 선듯 신경이 잔뜩 예민했다. 무엇보다 내 안에 감정적으로 모든 것에 삐딱하게 반응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똑같이 밤시간에 깨어 일하는 처지인데 에너지가 충만한듯 저만치 앞에서 쉴새없이 떠드는 누군가가 꼴보기 싫다고 느낀다. 계속되니 가서 입을 마구 두들겨 주고 싶다는 충동이 살짝 스쳐간다.
코에 산소를 공급하는 튜브를 자꾸 벗겨내는 환자를 자주 체크하며 다시 끼워주어야 할 때 짜증이 밀려온다. 엑스레이 결과 배에 가스와 변이 가득 차서 만삭의 임산부 처럼 부풀어 오른 환자에게 관장을 하면서도 짜증이 솟는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마약성 진통제 주사를 주었는데 간격이 되기 전에 또 달라고 하고 옆에 10분만 더 있어달라며 쉬지 않고 콜벨을 눌러대는 환자에게는 역정이 느껴진다.
좀 쉬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평소에도 어찌 그리 안자고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지 의아스러운 한 환자가 바닥에 있다는 연락. 그 방으로 향하는데 긴 한숨과 함께 이가 저절로 앙다물어진다. 옷을 다 벗은 상태에서 상반신이 침대밑에 놓인채 울부짖고 있다. 그는 평소에도 늘 통증을 호소하며 하소연하듯 말하는 사람. 난 이미 죽은 목슴이다...나는 더이상 이렇게 살고싶지 않다...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늙은 몸을 내려다보면서 짜증과 함께 '그 말이 맞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통증이 심해 세시간마다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는 이 환자는 물을 많이 마신다. 보통 사람에게 하루 6~7리터 정도의 물을 마시라면 고문이 아닐까. 마셔도 너무 많이 마셔서 문제였지만 검사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참 이상한 증상. 보통 약을 먹을 때는 전후로 마시는데 500ml 본인전용 텀블러에 든 얼음물을 마시고 약을 입에 넣었을 떄는 남은 물이 없어서 옆에 놓인 물통에서 새로 보충을 하는데 그 마저도 물이 바닥이라 새로 받아와서 줬다. 됐다 싶은데도 집요하게 하염없이 빨대로 물을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텀블러를 입에 대주고 있는데 물이 바닥인 소리가 났다. 끄륵끄륵. 순간 갑자기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밀면서 텀블러에 남은 얼음물을 얼굴에 냅다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나를 강타했다. 동시에 내 머리속에는 빨간등이 사이키 조명처럼 번쩍번쩍하면서 경고음이 들리는 듯했다. 삑--삑--삑--
아, 이렇게는 안되겠다. 새벽에 근무시간을 마치고 오늘밤에 나는 다시 돌아오면 안되겠구나. 무조건 쉬어야겠구나 하고 느꼈다. 나는 예전에 직장에서 개인적으로 아픈 것에 야박한 사회에서 살았어서인지 -물론 지금은 다를 수 있다.- 'call in sick'에 마음이 편치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몸이 어디가 명백히 아픈 것뿐 아니라 감정이 충분히 건강하지 않은 상태도 '아픈' 것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당장 '콜인'을 통보했다. 이것은 꾀병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페셔널한 태도라 여기며.
간호사로 일하면서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는 특별할 것이 없는데, 여기에 수면부족이 더해지면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기능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 잠을 잘 자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로 했다. 잠은 보약이라는 말은 맞다. 그런데 그 이전에 근본 같다. 우리 존재를 형성하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감정까지 지배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