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자주 돈에 대해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랐다. 당연히 돈은 나쁜 것, 돈은 우리 부모님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자랐다. 그 뿌리를 가진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돈과 멀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뿌리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맺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원망하고 자책했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열매만 보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나의 결핍을 받아들이는 것. 존중해주는 것.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그 결핍이 나의 성장에 기여했음을, 그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더 깊게는 그 결핍 마저도 나의 성장을 위해 내가 선택했음을 아는 것. 이것이 핵심이었다.
20대의 나는 그럴듯한 나무였다. 적당히 찰랑거리고, 적당히 푸른 꽤 괜찮은 나무였다. 하지만 튼튼한 나무는 아니었다. 삶의 비바람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20대 중반이 지나 폭풍과 비바람을 겪으며 그 때야 비로소 나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나는 밖에서 몰아치는 폭풍과 비바람을 견딜 만한 뿌리가 되지 못했다. 자주 흔들리고 자주 넘어졌다. 진짜 나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무는 무너지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20대의 나는 자존심이 세서, 무너지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모습이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의 나는 참 약했다. 눈물 흘리는 것, 나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나의 진짜 약함을 증명한다고 생각할 만큼.
20대 후반과 30대를 거치며, 나는 자주,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대한민국에 사는 평균 그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나는 감사하게도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참 많이 가졌다. 그리고 그 시간의 꽤 많은 부분을, 나의 결핍을 들여다보는 데 썼다.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나의 결핍을 뿌리부터 도려내 모두 드러내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사랑에 대한 결핍. 돈에 대한 결핍. 관심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 잘해야 한다는 완벽주의. 지금의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모든 나의 삶을, 파노라마 영화처럼 바라보았다. 결핍을 만든 과거와 그 과거로 인해 내가 삶에 붙인 해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지 않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나에게 더욱 강하게 영향을 주었던 나의 결핍이, 내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오히려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던 모든 것이 사실은 내가 상처를 주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모든 것은 다 나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가슴 뛰는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들여다봐야 했다. 수박 겉핥기 식의 자아 성찰이 아니라, 진짜 나를 마주하는 용기를 내야했다. 내가 기대했던 그럴 듯한 내가 아니라, 상처 투성이, 결핍 투성이의 나를 보아도,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용기 앞에서, 나의 모든 껍질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나의 진짜 가슴 뛰는 삶은 그 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