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똑같은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모두 제각기 개성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 아이마다 성향도 다르고 발달 정도도 다르니 아이들마다 내면을 채워가는 속도와 크기도 분명 다른 것이다. 아이의 타고난 성격이나 처한 환경, 엄마의 교육관이나 육아관, 엄마의 기질에 따라 아이의 성장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아이에게나 통용되는 일반적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놓쳐서는 안 되는, 한번 놓치면 그만큼 힘든 시간들을 겪어내야 하는 아이의 발달들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육아서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딸아이는 모든 것이 느렸다. 정말 모든 연령대별로 이루어져야 하는 발달과정들이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년 이상 느린 듯 보였다. 그럼에도 무슨 배짱인지 스스로 ‘느린 엄마’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기저귀 좀 늦게 떼고, 걸음마 좀 늦게 한들 무슨 걱정이냐는 생각. 말이 좀 늦을 때도 그랬고, 아이의 반응이 좀 늦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신경 쓰는 엄마들이 유난스러워 보였고,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는 엄마들을 속으로 비난하는 그런 엄마였다. ‘어떻게든 크겠지’, ‘때 되면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지나친 시간들 속에 앞으로 아이가 겪어내야 할 ‘아픔’의 시간들이 함께 녹여져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분명 엄마인 나에겐 좀 더 민감함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고, 적절히 반응해줘야 했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정말 아이가 늦되는 것에 대한 조금의 민감함만 있었어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상황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엄마로서 내가 가장 잘못하고 후회스러운 치명적 실수는 아이가 ‘어떻게든 크겠지’하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아이는 저절로 크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깨닫지 못한 무지함이다. 아이에게 채워줘야 할 것들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맛있는 건강식 이유식만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여주고, 귀로 듣게 하며, 손으로 느끼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감동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몸과 감각기관들을 통해 아이 스스로 표출해내고, 감정들을 쏟아낼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제공해주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처음 기관에 보냈던 여섯 살, 그때 뒤늦은 깨달음은 엄마를 변화시켰다. 엄마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소중한 내 아이에게 맞춰지면서 나는 비로소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엄마 손으로 해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1분 1초를 아껴가며 해주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엄마로서 잘못 생각했던 부분과 신경 쓰지 못한 부분들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엄마의 잘못된 육아관과 기준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내 아이의 성격과 발달과정들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참 많은 것을 깨달으며 아파하는 시간들을 한동안 가져야 했다. 육아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알려고 하는 마음도, 배우려고 하는 열정도 뒷전이었던 지난 5년이라는 ‘엄마의 육아’ 시간은 참으로 마주하기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간 시간, 골방에 들어앉아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나는 인생에 가장 후회스러운 흔적을 아주 굵직하게 남길 뻔했다.
혼자서 책을 읽는 동안 엄마의 지난 육아의 시간 속에서, 그 기억 속에서 내 아이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과거의 내 아이와 만나고 있었다. 아이의 낯가림과 내성적인 성격 탓에 아이가 주저했던 것들,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식함을 동원해서라도 가르치려 들었던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반드시 아이와 함께 해줬어야 할 것들은 엄마가 힘들어서, 다른 데 신경 쓸 일들이 많아서, 여건이 되지 않아서 등 다양한 이유를 대며 그냥 지나쳐 왔던 것들도 수없이 떠올랐다. 그런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내 아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지금의 내 아이의 모습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바라본 엄마로서의 내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부끄러웠다. 나는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아이의 감시자 역할을 했을 뿐 아이를 잘 키워보려는 육아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던 무심한 엄마였다. 내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엄마와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에겐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이 참으로 버거웠다. 학원 강사라는 직업 특성상 매일 수업 준비며, 학생 관리며, 늦은 귀가에, 하루 종일 서서 쉼 없이 말을 해야 했다. 그러니 아이와 대화의 시간을 갖고, 몸으로 교감하며 놀아주는 것은 이미 방전된 엄마에겐 늘 큰 숙제처럼 느껴졌고, 마음의 부담이었다. 그렇게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던 엄마의 육아 태도가 앞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감당해내야 할지는 결국 아이의 느린 언어발달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육아서와 육아 관련 전문자료들을 읽어보니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의 발달 중에서도 그 시기에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정체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 중 대표적인 경우가 언어발달이라고. 만 3세 전후에 이루어지는 아이의 언어발달은 아이의 성장에 무척 중요해서 이 시기에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아이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성 발달에까지 연속적으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시기보다 너무 앞서 가르쳐서 생길 수 있는 정서적, 정신적인 문제도 있지만, 너무 뒤늦은 자극으로 영영 시기를 놓쳐버리는 발달도 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때 되면 하겠지’ 했던 엄마의 치명적인 실수로 꼭 그때가 아니면 발달로 이어지지 못하는 자극들을 주지 못했다. 그 덕분에 나는 아이를 지금껏 키우며 가장 후회스러우면서도, 살면서 내게 가장 큰 아픈 경험을 안겨주었던 시간들을 호되게 치러내야 했다. 엄마인 나는 아이에게 세심한 민감성을 가지지 못해 아이가 무언가 힘들어서, 잘 되지 않아서 보내오는 많은 신호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아이가 말이 늦을 수밖에 없는 육아환경에 대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렇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와 성격 급하고 바쁜 엄마 사이에는 일방적인 요구와 지시, 간섭만이 있었을 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의 기분을 파악하는 노력은 부족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깨닫게 하고 있었다. 엄마가 힘을 내 노력하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전하며 나를 담금질했다.
책을 통해 육아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아이의 해결사, 감시자 노릇을 하는 엄마가 아닌 아이의 작은 소리도 크게 듣는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아이가 보내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지긋히 바라봐주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더라도 아이가 엄마와 함께 하려고 한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려고 한다. 아이의 내면이 단단하고, 아름답게 채워지는데 엄마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면 나는 이제 아이가 커가는 이 시간들을 그냥 흘러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엄마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실수를 했다면 그것을 깨닫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려는 것이다. 아이의 요구에, 아이의 감정에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으려고 한다. 아이는 결코 저절로 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