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행복함을 주는 일을 찾아가는 것.

<나에게 있어서 보석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by 말선생님

출산 이후 가장 힘들었던 7월이 지나갔다. 최선을 다해 내 손안에 넣으려 했지만, 버티고 버티다가 놓쳐버렸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 그때 그것들을 억지로 잡고 있지 않았기에 정말 다행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우리는(이라 함은 80년대 생)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꿈'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너는 꿈이 뭐니?",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나는 90년도 초반에 유치원에 다녔는데 사진을 보니 생일잔치 때 '나는 나는 자라서 OO가 될 테야'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치원에 다녔을 당시 기억이 자세히 나지는 않지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선생님, 저는 청소부가 될 거예요!'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유치원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유치원 생일파티 때는 '선생님이 될 테야'로 바꾸어서 노래를 부르도록 설득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의 반응 또한 '청소부'라는 단어에 표정이 살짝 굳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20년이 지난 후엔 뉴스에서 환경 미화원 채용시험 경쟁률이 엄청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의 어른들은 '청소부'(현재는 '환경미화원'으로 바뀌었지만)가 어떠한 일을 하고 왜 그런 직업을 갖고 싶은지에 집중하기보다는 '공주님, 왕자님, 선생님, 박사님, 의사 선생님, 간호사..' 등의 사회적인 인지도에 초점을 두는 것 같았다.


그 후, 10년이 지난 후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 대학 학과를 준비할 때 또한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물론 90년대 초반보다야 직업도 다양해지고 유망 직종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나의 제자가, 이 학교 졸업생들이 갖기 원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교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반에서 중상위권 정도에 속하는 친구들의 장래희망은 대부분 교사였다. 나 또한 교사가 되고 싶었다. 대학은 웬만하면 서울권에 소재한 대학으로 가고 싶었다. 못해도 지방으로 간다면 국립대 사범대에 가고 싶었다. 친구 관계 또한 원만하지 않았다. 학교가 만든 틀에 맞게 공부에 몰입하다 보면 성공한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다. '대학만 간다면' 나의 인생은 탄탄대로가 되고 이 지긋지긋한 시골 바닥에서 벗어나서 가끔 학교에 찾아오는 선배 언니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화려하게 하고 선생님들을 뵈러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프리랜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이를 양육하면서도 경력을 유지할 수 있고, 무엇보다 육아 경험이 상담을 할 때나 아이들을 대할 때 플로스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마음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대학병원에 들어가거나 못해도 중형 병원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을 줄 알았던 나의 모습은 상상과는 점점 동떨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상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주 5일 근무는 어려움이 있어서 프리랜서로 그토록 원하던 '병원 언어치료사' 타이틀을 갖게 되었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나에게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너, 정말 행복하니? 온이에게도 신랑에게도 행복감을 주고 있니?'



"아이는요?" "아, 종일반에 맡기면 돼요. 생각보다 잘 떨어져요." 이러한 대화를 주변 사람들과 수차례 나누던 찰나에 아이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점점 자라고 있었고, 군것질 거리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면 시간이 줄어든다는 시기와 맞물려서 아예 낮잠을 자지 않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늦게 마치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에게는 주 3일 이상 엄마와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 반까지 떨어져 있는 일상이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버티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에는 일에 더 몰두하고 일을 늘리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7월 중순 무렵, 아이도 잘 양육하면서 나의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이를 재우고 노트북으로 채용공고 사이트를 계속 들어가는 나를 보면서 신랑은 "오늘도 진로 탐색 중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최대로 번졌던 시기에는 하루에도 10번은 넘게 채용 사이트를 들낙날락거렸고, 남몰래 특수교육과 편입을 알아보기도 했다. 정말 불안했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그 옛날 어른들이 나에게 심어주었던 타이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좌절감 때문에. 나에게는 더 움켜쥐고 있을 공간이 없는데 계속 무언가를 잡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선생님, 혹시 OO요일에 OO수업 가능하세요?" 제안에 큰 고민 없이 "네."라고 대답하였고, 병원 출근 또한 아동 수가 더 차게 되면 주 3일로 늘릴 생각이었다. 주 6일 일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을 여유 있게 짤 수 있을 줄 알았다.




샘과데이브가땅을팠어요.jpg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책을 보면, 샘과 데이브는 보석이 있는 곳과 매우 근접한 거리까지 땅을 파지만 결국은 늘 그 가까운 곳까지만 땅을 파고 보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한다. 발견해야 할 보석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쉽사리 변하는 마음 때문에, 그리고 한 가지에 몰두할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보석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독자평도 종종 보게 되는 책이다.




내가 바라던 이상향은 어떠한 기관에 정규직으로 채용되어서 복지를 누리고 명절 보너스도 받고 고정적인 월급이 매달 들어오는 곳이지만, 내가 출산 이후 매일 파던 작업은 블로그에 글을 쓰고, 그림책 후기를 남기고, 교재교구를 만들면서 나의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었다. 오프라인 출퇴근은 주 2-3일만 유지하면서 그렇게 땅을 파고 있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는데 이전에 우리 사회는 직업에 대한 귀천을 구분 짓는 것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직업에 대한 가치관을 심어주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엄마'가 되어서 갖는 직업은 그에 대하여 '귀천'을 구분 짓기가 더욱더 불가능할 것 같다.


내가 행복하고 내가 아이를 양육하면서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엄마가 갖는 행복과 불안함은 모두 아이에게, 그리고 신랑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아이가 자는 틈에 블로그에 글을 한 편 써서 올리는 게 행복하다면 나는 작가가 될 수 있고 점점 전문 블로거가 되어갈 수 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있는 동안에 그림을 배우거나 베이킹을 배워서 나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면 비록 아마추어지만 언젠가는 그 안에 있는 보석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 또한 이제는 내가 즐겨서 하는 일이 돈이 되는 시대가 왔다고 한다. 갑자기 '돈'이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와서 주제가 이탈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만큼 나의 행복감에 집중을 하다 보면 그 일이 나에게도, 나의 아이에게도 보석 같은 존재로 남지 않을까. 물론, 돈이 되든 되지 않든 내가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이 부분을 점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사춘기 학생이 자아성찰을 하는 것과 같은 고된 자아성찰 끝에, 올 하반기는 오프라인 출근을 줄이고, 온라인 공간 안에서 언어발달에 대한 고민을 안고 계시는 부모님들의 고민을 들어드리고 조언을 해드릴 수 있는 일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남들의 시선 안에 갇혀서 나의 일을 결정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래서 말인데. 근처 의료원에서 정규직 채용 공고가 났지만 이력서조차 내지 않았답니다. 채용될 가능성도 낮았겠지만 이전 같았으면 기를 쓰고 달려들었을텐데. 육아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네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말선생님의 <그림책 D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