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나는 식사에 대해 많이 민감해하지 않는다. 나는 끼니 곡물 외 간식을 많이 먹지 않는 스타일이며, 아들은 배가 차면 멈추는 스타일로 매끼 식사량이 많지 않다. 아들은 대체로 나와 비슷한 식성을 소유하고 있다. 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배가 고파서, 먹거리를 찾아서 허우적대며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도 아니다. 평소의 이런 모습들이 횡단열차 안에서 간소한 식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을 만들어 준건 아닌지.
다만입이 짧은 아들의 특징은 똑같은 음식이 반복되거나 음식 냄새가 평상시 먹고 있는 달콤함이나 짠맛에서 벗어났을 경우 먹는 것을 바로 멈춘다는 사실(김치는 배추 김치만 드심). 어디 그뿐이랴 몸의 위(胃)에서 그 양이 범위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무슨 큰일이 일어날 듯한 표정으로 식사 자리를 떠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름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아들의 식성을 탐색해 보기로 한 것.좁은 횡단열차 안에서 먹거리를 대하는 모습은 어떠할까? 엄마인 나 역시도 궁금했다. 사실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나야 이런 경험을 오랫동안 해온 터라 임기응변이 강하지만 아들의 11년 인생에서 러시아의 열차 안에서 음식 문화를 대하는 자세는 녹록치 않으리라는 것. 그래도 무사히 여행을 마친 것을 보면 아들도부실하고 부족한 음식에 자신의 식성을 감추고 나름 열심히 잘 맞춰주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들의 입맛을 고려하여 볶은 김치와 구운 김, 볶음고추장을 한국에서 공수해 왔다. 컵라면(짜장, 김치라면, 치킨 라면 등)과 여러 음식과 간식은 현지 마트에서 구입했다.
러시아에서 먹는 음식에 대한 불안?은첫날부터아들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엄마인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슈퍼마켓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었다. ‘주변에 마트가 있는지 검색을 해봐라’는 엄마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던 아들이 내놓았던 안은 “엄마가 검색해요!”였다(째려보며 부글부글 거리는 얼굴 표정을 아들에게 보였다). 나는 로밍해온 폰으로(아들은 러시아 유심을 갈아 낌) 느려 터지는 검색을 포기했다. 영어가 되는 듯한 역무원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자세한 답변이 되돌아온다. 바로 역 건너편에 있다고 손으로 가리켜준다. 역시, 나는 입으로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이가 들어가는 아줌마가 맞다. 언어가 되는데 뭐가 불안한가?의 마음으로.
슈퍼마켓의 한국 음식포장은 러시아어(영어로 된 포장지는 거의 없었기에 그림으로 판단함)뿐이였다. 내용물은 한국식이라는 라면과 스파게티, 짜장과 한국에서 먹어본 비슷한 빵과 과자를 여러 개 구입했다. 열차 안에서는 뜨거운 물이 언제든 넉넉하게 이용하는 지라 라면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데에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아점(아침과 점심 사이의 식사)의 형식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예상되었다. 늦게까지 잠을 푹 잘 자는 아들의 일정과 맞춰지는 것은 대부분 아이들과 여행하는 부모들이 그러할 듯. 여행이 아닌 평소에는 아침을 먹지 않는 나는 커피와 차를 마시며 아들이 깰 동안 글을 쓰면 되었다. 점심은 이러저러한 간식으로 채우면 되고, 저녁은 열차에 미리 주문해둔 식사로 해결하면 우리의 기나긴 열차여행은 나름 식사의 준비에서 걱정을 내려놓아도 될 듯해 보였다.
아침 식사가역시 애매하기는 했다. 첫날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을 걱정한 내가 열차에서 첫 끼니로 결정한 것은 김치사발면과 모닝빵이었다(주변에 앉은 러시아인들은 컵라면이나 컵 감자수프 등의 인스턴트식품에 빵을 꼭 곁들어 찍어먹거나 그리고 홍차나 차를 마시는 순으로 식사가 마무리된다). 아침부터 컵라면이라니! 한국 우리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입맛을 돌리기 위한 나의 얄팍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없으리라(아들의 식사도 책임져야 하는 책임자가 되니 오롯이 '나홀로' 결정 여행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빵은 아들이 아침으로 주로 먹는 것이라 어떠한 이질감도 없이 ‘그래도 우리 참 잘 먹는다’는 눈빛이 오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완벽한 한국 맛이 들지 않는 컵라면은 아들이 남긴 나머지가 내 차지가 되었으니. 아침부터 컵라면은 좀 무리다 싶었다. 이후 저녁밥에 같이 나온 빵을 챙겨놓고 아침에 내놓으니 식사가 단순 명쾌해졌다.
횡단열차가 오래 정차하는 역에서는 이렇게 음료수나 과자, 간단한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다. 아들은 초코파이 사이다 콜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열차 안의 여러 달콤한 간식을 아들이 놓칠 리가 없다는 것은 엄마인 나는 잘 안다. 열차 간이역에서 발견한 초코파이를 그냥 두고 갈 녀석이 아니다. 오래 정차하는 역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필요를 잘 알고 있는지 지역 사람들의 반찬거리를 대거 판매하고 있었다. 그 틈에 끼어 삶은 달걀을 발견하고 금세 익힌 러시아어 숫자를 대며 손을 올려본다. 삶은 달걀은 식사나 간식으로 참 유용했다. 소시지도 열차 안의 사람들이 좋아했던 식료품 중 하나.
저녁 식사는 열차를 타는 동안 1인분 예약해둔 상태였다. 열차표를 한국에서 예약할 때 유료 항목에 대해 유심히 살펴보면 더 좋았을 것 그랬다. 영어로 표기가 되지 않아서 번역기를 사용하며 해석을 했지만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열차를 타보니 모든 게 드러났다. 시트 예약 체크를 하지 않았더니 시트가 나오지 않았었지. 특히 식사 예약을 할까 말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꽤 오래갔다. 치킨과 다른 두 가지 메뉴 사이에서의 선택의 권한이 있었지만, 그 다른 하나가 끝내 무언지 알 수 없었던 것.
1인분 저녁 식사. 매끼 흰밥과 수수밥이 번갈아 나왔으며 치킨 스프와 당근김치는 변함이 없었다. 당근 김치에 고추장을 섞어 먹었더니 한국 입맛이 살아난 듯했다.
열차에 탑승하고 나서도 어떠한 시간대에 식사를 주문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해거름이 되자 어슬렁어슬렁 식사가 담긴 작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는 승무원. 아! 우리가 주문한 게 저녁밥이었구나. 하며 그래도 쌀밥과 비슷한 곡물의 탄수화물이 반갑기만 했다. 아들도 붉은 당근 김치가 도드라지게 밝아 보였던 식판에 눈을 크게 떠보는 것이다.
참새의 눈물방울만 한 치킨 스튜를 밥에 비벼보기도 하고, 당근 김치를 한입 먹어보기도 하면서 그들의 입맛에 조금 다가가려는 눈치. ‘이런 게 여행이란다!’라며 입에 맞지 않는 내색을 내가 먼저 감추기도 했다.
또한, 당근 김치를 꼭 한번 먹어봐야지 했는데 횡단열차 안에서 바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언가 내 맛도 네 맛도 없는 당근 김치는 어딘가 여행 책자에서 '샐러드 맛'이라 읽었던 게 기억난다. 직접 먹어보니 야채샐러드 절임에 가까웠다.
추운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려인들의 지혜로움에 박수를 보낸다. 러시아로 이주해오던 고려인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며 그들의 대표적인 먹거리로 승화시켰다는 당근 김치. 진한 양념간이 들어가지 않은 기운 없는 샐러드 같은 느낌으로 나는 받아들였지만, 환경에 맞는 삶은 대단한 매력을 지녀 보인다.
여유롭게 정차하는 역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먹거리를 들고 나와 미니 매점을 만든다. 연어알, 각종 생선, 지역 음식을 사기 위해 승무원 언니도 바쁜 움직임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