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일기] 마땅찮은 외투
흡족하지 않은, 마음에 안 드는
마땅찮다 | 형용사
【…이】 흡족하게 마음에 들지 아니하다.
나는 네가 하는 짓이 마땅찮다.
그는 나를 늘 마땅찮게 여겼다.
(출처: 우리말샘)
아무 생각 없이 가을 겉옷을 걸치고 밖에 나갔다. 추워서 이가 덜덜 떨렸다.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더워 죽을 것 같은 날씨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추워졌다. 장롱 앞에 서서 고민했다. 예쁜 가을 옷을 입기에는 늦었나? 가디건 하나로 버티기는 좀 춥고, 패딩을 입기에는 아직 더운 날씨인데 뭐 입지? 쓱 훝어보다가 오, 야구 점퍼 딱이다! 라는 생각에 꺼내서 입었는데 엄마가 한소리를 했다. "이제 그건 그만 입어." 그 야구 점퍼는 대학교 과잠이었고, 나는 올해 2월에 졸업했다. 졸업한 지 8개월 정도 되는데 학교 잠바를 입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을 코트보다 따뜻하고, 겨울 패딩보다는 시원한 외투가 없었다. "나 입을 게 없어!"
학교 과잠을 (아마도) 마지막으로 입고 나가서 굿윌스토어에 갔다. 해당 매장은 중고물품이나 새 물품을 기증받아 판매하는 곳으로,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고용하는 특징이 있다. 가격이 저렴하기도 하지만 부담없이 옷을 입어볼 수 있고 사람도 많아서 직원들의 관심을 안 받을 수 있다. 내향성이 강한 나로서는 옷가게 직원분이 이것저것 말을 거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아주 최적의 장소이다.
굿윌스토어 로고내가 해당 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색을 정한다. 옷을 종류별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별로 정리해두기 때문에 원하는 색상 코너로 이동하는 것이다. 둘째로, 옷을 훑으면서 재질을 살펴본다. 아무리 디자인이 예뻐도 재질이 별로면 빨래를 한 번 하면 못 입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디자인을 본다. 나랑 잘 어울리는지, 사이즈는 맞는지 등을 확인한 다음에 넷째로, 하자를 체크한다. 특히 외투의 경우에는 주머니가 뚫려있는 경우가 꽤 많아서 손을 꼭 넣어본다.
그렇게 30분째, 원하는 옷을 못 찾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재질이 별로고, 재질이 좋으면 색이 별로고, 색이 괜찮으면 크기가 별로고, 크기가 맞으면 상태가 별로고, 상태가 괜찮으면 나랑 안 어울리고... 또한, 중고가 아닌 새 옷은 나오는 족족 눈치 빠른 분들이 전부 집어간다. 허탕을 치는 날에는 그냥 그런 후회가 든다. '우리 집이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아울렛을 가서 시간이나 절약할걸...' 가끔은 구경한 시간이 아까워 꼭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더 후회가 든다. '아 저거 몇 번 입지도 않을 거 괜히 샀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마침 창고에서 검수를 마친 신상품(?)들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새로 전시된 옷 덩어리로 몰려갔다. 나도 쓰윽 둘러보는데 웬걸, 골든 리트리버 색의 플리스 점퍼가(aka. 후리스, 뽀글이) 있는 것이다. 패딩은 아니고, 야구 잠바도 아니고, 가을 코트보다 따뜻한 지금 계절에 입기 딱 좋은 옷이라서 냅다 집었다. 다행히 사이즈도 맞고 주머니도 문제 없고 심지어 사용감도 없다. 제조연월이 적힌 걸 봐서는 쪼끔 오래되긴 했는데, 안 입은 채로 보관된 202x년 산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라 생각해서 계산대로 갔다. 그렇게 17,500원에 잠바를 하나 샀다.
마땅찮은 외투 때문에 쇼핑을 나갔다가 마땅치 않은 옷만 있어서 허탕인가 싶었는데 마땅한 옷을 발견했다. 마땅하다, 마음에 흡족하게 드는 것을 의미한다. 마땅하지 않다, 혹은 줄여서 마땅찮다는 흡족하지 않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땅찮은게 좋은건지 마땅한게 좋은건지 가아끔 헷갈리지만 (마치 칠칠맞은게 좋은건지 칠칠치 못한게 좋은건지 헷갈리는 것처럼) 어쨌든 마땅하고 마땅찮은 감정을 모두 느낀 하루였다.
p.s. 칠칠하다가 좋은 뜻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