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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Nov 06. 2024

[감정일기] 어처구니없는 벽

기가 막히는 벽 부서짐

어처구니 없다 | 형용사

(1)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

    약이 뒤바뀌는 어처구니없는 간호사의 실수로 상처가 도리어 덧나고 말았다.  

    내가 그 여자에게 결혼 신청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어머니와 형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출처: 우리말샘)


살면서 벽을 부셔본 적이 있는가? 난 있다. 그것도 여러 번.


아 물론 나는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사람이 아니다. 분노에 가득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벽을 때리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벽을 부순 것은 전부 내 탓이 아니다. 벽 탓이다. 더 엄밀히 따지면 그 옛날에 이 집을 지은 사람의 잘못이고, 이 집을 설계한 자의 잘못이다. 아니, 그냥 오래 흘러버린 시간이 잘못이려나? 


집에 있는 벽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내력벽비내력벽이다. 내력벽은 지붕이나 바닥의 하중을 아래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무게를 지탱하는 벽이다. 반면 비내력벽은 무게를 지탱하지 않고 단순히 공간만 구분하기 위해 세워진 벽을 의미한다. 만약 집을 개조하고 싶다면 비내력벽은 뜯을 수 없고, 내력벽은 뜯어서 공간 구조를 바꿔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아파트는 벽식구조로 되어있어 배관이나 배전반을 숨기기 위한 석고보드 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벽이 내력벽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필이면 우리 방의 한쪽 벽면이 비내력벽이다. 부셨을 때 내부 색이 흰색인 것을 보니 석고보드 벽이라 추정한다.

출처: freepik (https://shorturl.at/b1Jf9) 참고로 난 저런 적 없다

각설하고, 처음 벽을 부셔보았던 것은 아마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가끔 바람이 세게 부는 날 창문을 열어두면 문이 꽝! 하고 닫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다시 문을 열려고 하면 방과 거실의 압력 차이에 의해 문이 잘 안 열린다. 쉽게 설명하면 내 방 창문은 계속 열려있으니 방 안으로는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계속 방문을 미는 것이다. 요즘은 그 정도 바람의 힘이야 개의치 않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릴 때는 문이 안 열리니까 온 힘을 다해 문을 세게 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쾅! 동그랗게 튀어나온 방문 손잡이가 벽을 부셨다. 동그랗게 패인 벽을 보면서 아주 당황했었다.


가장 최근에 벽을 부순 건 저번주 주말 아침이었다. 잠이 깨어서 말똥말똥하지만 왠지 주말이라 일어나기 싫었다. 침대에 누워서 한 손으로는 웹툰을 보면서, 발로는 벽을 밀고 있었다. 왜 내가 벽을 밀고 있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벽에 발을 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하고 발이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확인해보니, 벽이 들어갔다. 다행히 벽지가 전부 찢기진 않아서 벽지를 살살 당겨 원래 위치에 두니까 티가 안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힘이 세진 않은데, 고작 발 좀 밀고 있었다고 부서지는 벽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황당하고 당황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상황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약간 '황당 < 어이없음 < 어처구니 없음'의 순서로 느낀다. 벽 부서짐 사건은 쾅 친 것도 아니고 발로 밀다가 부서진 것이므로 '어처구니 없음' 단계에 해당하는 사건인 것이다.

남들은 나와 비슷한 순서로 감정을 느끼려나? 궁금하다.


p.s. 벽 부심 사건이 있고 나니까 모기를 잘 못 잡게 되었다. 원래는 벽에 내려앉으면 냅다 후려쳤는데, 왠지 후려쳤다가 벽을 더 부술까봐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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