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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 쑥스러운 눈사람 만들기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은 느낌

by 미레티아

쑥스럽다 | 형용사

(1)【…이】【-기가】 하는 짓이나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우습고 싱거운 데가 있다.

악수를 거절당하자 내밀었던 손이 오히려 쑥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출처: 우리말샘)


"나가자~ 산책가자~" 우리집에서 내 포지션은 강아지이다. 만날 산책 가자고 조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쩌다보니 앉아서 하는 업무 위주의 삶을 살게 되어서 하루에 한 번도 나가지 않으면 굉장히 괴롭다. 왠지 소화가 안 되는 것 같고, 왠지 오늘 하루 열심히 산 것 같지 않고... 그래서 꼭 나가서 강을 따라 걷거나 살 것도 없는데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의 다이소를 가곤 한다.


이번 주말은 눈이 펑펑 내렸다. 방을 뒤져서 장갑을 찾아낸 후, 나가자고 그랬다. 그렇지만 아빠는 피곤하고, 엄마도 추워서 나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혼자 놀고 온다고 그랬다. 어린이 시절에 그런 발언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그랬지만 이제는 성인이니 그래 갔다와라, 그랬고 오는 길에 이것저것 사오라고 심부름도 맡겼다. 내심 기뻤다. 왜냐하면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같이 만들어 줄 것도 아니고, 혼자 나가는 게 아무래도 편하다.


발이 젖는 걸 싫어서 등산화를 신고 동네의 개천을 쭉 따라 걸었다. 이미 눈을 많이 치운 상태였다. 어디서 눈사람을 만들까 고민하며 걷다보니 달밤에 에어로빅을 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평상시에는 농구, 인라인스케이트, 줄넘기 등으로 가득 찼던 장소였는데 아무도 거기를 밟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아무도 안 밟은 눈. 아싸, 하고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이유를 알았다. 그 바닥이 약간 탄성이 있고 매끈매끈한데 눈이 살짝 녹아서 물이 되어서 아주 미끌미끌하니 넘어지기 딱 좋은 바닥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레탄 바닥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등산화를 신었다. 비록 5년이 넘은 신발이지만 아직도 미끄럼방지 기능이 잘 작동해서 내가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작은 눈뭉치를 만들고 바닥에 굴리기 시작했다. 굴리고 - 다지고 - 굴리고 - 다지고. 습설이라 그런지 눈이 금방 붙어서 눈뭉치가 매우 큰 덩어리가 되었다. 마음같아서는 허리까지 오는 눈덩이를 만들고 싶었는데 어느 정도 커지고 나니까 내 혼자 힘으로 굴리기 힘들었다. 그렇게 끙차 거리며 눈을 굴리는데 주변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기하는 사람들, 한 번씩 쳐다보고 간다. 운동기구를 하는 사람들, 계속 쳐다보고 계신다. 가장 황당했던 것은 주변에 어린이가 없었다. 아무도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 이글루 등을 만들지 않았다. 오로지 나 혼자 거대한 눈덩어리를 굴리고 있었다.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온 이후에는 시간싸움이었다. 몸통으로 쓰일 눈은 그만 굴리고, 머리로 쓰일 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무 커지면 못 들어올리거나 들어올리며 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그게 더 창피할 것 같으니 그냥 작은 머리를 붙이고 눈을 주워다가 덕지덕지 붙였다. 어깨깡패 눈사람이 그래도 비율이 괜찮은 눈사람이 되었을 때, 덤불에서 삭정이를 주워다가 이목구비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사진을 찍고, 심부름을 하러 도망갔다.

KakaoTalk_20250105_163004356.jpg 눈사람. 빨간 장갑 한쪽은 잃어버렸고, 파란 장갑은 코바늘로 내가 뜬 건데, 한짝을 뜨고 나니 의욕이 사라져서 반대쪽이 없다.

쑥스럽다, "하는 짓이나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우습고 싱거운 데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일까? '자연스럽다'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힘들이거나 애쓰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이다'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수가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눈으로 놀이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성인은 그렇게 노는 경우가 어린이들보다 적으니 눈사람 만드는 행위가 참 쑥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내가 대학 교정에서 그랬으면 쑥스럽지 않았을 텐데, 출근할 걸(??)


그렇지만 쑥스럽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또 안 좋은 것 같다. 어쨌든 우리 모두 다 다른 개개인인데, 개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다양하고 이질적이어야 발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그러지 못하겠지만, 모두가 똑같다면 사고의 확장이 되기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요즘처럼 유튜브와 인스타만 보는 시대에! 눈사람 만들기가 얼마나 건전한데!! 눈치 볼 거 없지!! ...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정말 그날은 너무 쑥스러웠고 창피했다. 나이값을 못하는 것 같아서....


아 참, 도망가며(?) 보니 어떤 어르신이 내 눈사람 옆에서 사진을 찍고 계셨다. 사실 그 분이 거의 시작부터 계속 구경하셔서 더 뻘쭘했던 것도 있는데, 좋아해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s. 다음날 아침에 근육통으로 엄청 고생했다... 애기때는 눈덩이가 좀 커지면 아빠가 굴려줘서 몰랐지... 그렇게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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