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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Apr 25. 2024

그래, 난 데이비드.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

1. 예전에는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보물찾기 하듯 내게 맞는 작가를 찾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제는 워낙 온라인 주문에 익숙해져서 어쩌면 알고 있던 작가의 작품만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문학계간지 같은 걸 보면 견문이 좀 더 넓겠지만 난 그러지도 않다보니 순전히 '우연'이 아니면 신규작가를 접할 기회가 드물다.


그나마 인스타그램에서 같이 북스타그램을 하시는 분들의 후기에 도움을 받는데 그 안에도 유행이 있고, 때로 광고의 물결이 밀려오기도 하다보니 여전히 새로운 작가에 대한 갈증은 남는다.


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란 작가는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란 평론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평론집이나 서평집은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되는 꽤 괜찮은 기회다. 물론 미리 읽은 서평이 일종의 스포일러 역할을 하거나, 괜한 기대심리만 키워서 도리어 책읽기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란 인간은 애초에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 부작용은 꽤나 적은 편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내겐 꽤나 낯설다. 그러니 미리 그에 대해 소개해놓은 책날개의 글을 옮겨보자.


미국 소설가, 1962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8년 46세에 사망했다.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졸업논문으로 쓴 장편소설 《시스템의 빗자루》가 1987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그 후 1996년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형식 과잉의 두 번째 장편소설 《무한한 재미》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무한한 재미》는 20세기 말 미국 문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작으로, <타임>은 이 소설을 '20세기 100대 걸작 영어 소설'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11년 출간된 세 번째 소설 《창백한 왕》은 윌리스가 죽기 전까지 십여 년간 집필한 미완성 유작이다. 그는 죽기 마지막 날까지 원고를 정리하고 유서를 썼다. 십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았고, 스무 살 무렵 첫 자살충동을 겪은 후 평생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항우울제가 잘 듣지 않을 땐 전기충격요법을 받았고, 그로 인해 기억력 상실 등의 후유증을 겪다가 회복되고는 했다. 자살 충동을 동반한 우울증 외에도 술, 마리화나, 텔레비전, 섹스, 설탕 중독으로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냈으며, 병균이나 물, 비행기 등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 2007년 오랫동안 복용해온 항우울제 나르딜의 극심한 부작용으로 약을 잠시 끊지만 곧 우울증 삽화가 재발했다. 새로 처방받은 약은 더이상 효과가 없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책날개 소개문


2. 이 책에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 9편이 실려있다. 각각 이 글을 언제,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미리 설명이 친절하게 달려 있어서 글과 저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글만이 아니다. 저자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된다.


당장 표제작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부터가 의뢰를 받아 수행한 크루즈 여행기다. 자... 누군가가 크루즈 여행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했을 때는 냉정하고 자유로운 평가를 일정부분 허용할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다들 재밌다고는 하지만 난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을 일입니다." 란 반응을 (내심 크루즈 선사를 망하게 하고 싶어했던 것이면 모를까) 기대할 가능성은 무척 낮지 않을까?


그 뿐인가? 「톰프슨 아주머니의 집 풍경」에서는 9. 11 테러 당시 작가가 살고 있던 시골 마을 사람들이 보인 태도에 대해서 자신이 일종의 '어리둥절함'으로 반응하는 걸 숨기거나 변명하려 들지 않는다. 「랍스터를 생각해 봐」는 더하다. 애초부터 잡지사가 랍스터축제를 취재해 달라는 목적으로 의뢰한 글이다. 그런데 작가는 랍스터 축제에서 벌어지는 비윤리적인 조리행태를 고발한다.

3. 솔직히 이 쯤 되면 이 작가에게 뭔가를 '의뢰'하는 쪽의 저의를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나 싶은 수준이다. 적어도 변태끼나 똘끼가 충만하거나, 아니면 바이럴마케팅을 노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사실 이런 캐릭터가 세상에 아주 드문 것은 아니다. 일단 뭐든지 '엇지르고' 보는 게 지성인의 기본 태도인 줄 착각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뒤집어 보기'. '삐딱하게 보기'만으로 이름을 날리는 경우도 꽤 많다. 태도 자체가 은근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관점을 약간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때로 의외의 소득을 얻는다. 조금의 역지사지, 몇 개의 수순을 뒤바꿔 짚어보는 것으로 눈이 환해지고 문제의 지름길을 찾아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캐릭터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의외로 기술의 폭이 무척 좁다는 거다. 할 줄 아는 게 '엇지르고 뒤집는' 것 밖에 없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것만으로도 나름의 소득을 거둬왔기 때문에 다른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도리어 그 자신에게 저주가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 되치기 한 번만 당하면 그의 빈약한 밑천은 일순간 만천하에 공개가 된다. 억지로 버텨보려하지만 그럴수록 추한 모습만 더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런 류의 삐딱한 글을 태생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누가 그걸 모르나?' 하고 더 비딱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작가의 솔직함에 용기를 얻어 나도 매우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이 책을 집어들기로 결정한 마지막 요인은 작가의 죽음이었다.


죽은 작가에게서는 이상한 안도감이 느껴진다. 그의 삐딱함은 더는 공격받을 리가 없고, 그는 밑천을 의심받을 필요 없이 글 자체만으로 존재하게 된다. 살아있어서 헛짓거리를 끝도 없이 해대는 인간들에 비하면 죽은 작가는 실점의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니 역전을 당할 가능성도 없다. 진짜 가끔은 '당신은 살아있느니 서글픈 요절이 정답이었겠소.'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물건들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이 책의 모든 글이 삐딱한 것은 아니다. 다른 글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자신의 기본 실력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언어와 문학을 다루는 글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겸허하다. 그렇기에 그의 삐딱함은 도리어 빛을 발한다. 눈 코 입을 비뚤게 붙인다고 누구나 피카소인 것은 아니다. 쌓아올리는 기본실력이 입증된 다음에야 해체도 가능한 법이다.

4.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라는 사람의 삶 자체는 불완전한 것이었음은 아무래도 분명하다. 그의 삶의 약력만 살펴보아도 마치 우울증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일 정도다.


이쯤되면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물론 천재적 재능이 있다면야 못할 일은 아니었겠으나,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드는, 우울증이란 거대한 맹견을 등 뒤에 두고 달리면서도 글을 쓴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지 싶다.


먼저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이란 글에서 한 대목을 빌려와보자.


아름다움은 경쟁 스포츠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스포츠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표현되는 무대다. 그 관계는 용기와 전쟁의 관계와 대충 비슷하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운동적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의 힘과 매력을 보편적이다. 이것은 성별이나 문화적 규범과는 아무 상관없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과 화해는 것에 관계된 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누구나 깨달음의 궁극은 다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걸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목사)은 설교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룰이 있어야 스포츠는 예술이 된다. 금을 그어 놓아야 하고, 네트를 세워 놓아야 한다. 우린 그게 방해물이라 생각하지만 그게 있어야만 아름다워진다."


사실 스포츠의 목표는 승리이지 아름다움이 아니다. 오죽하면 '이겨도 등신, 져도 등신이면 이기는 등신이 되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도 한두 번이지 3연패만 해도 당장 팀 해체 하라는 소리부터 나오는 게 스포츠다. (난 이 글을 24년 4월 21일에 쓰고 있는데, 오늘 내가 응원하는 기아타이거즈는 NC다이노스에게 무려 15대 4로 졌다. 아.. 이 분노는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스포츠는 때로 예술이 된다. 2사 만루 풀카운트에서 강타자의 몸쪽 구석에 정확하게 꽂히는 속구 스트라이크.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가까스로 올라온 크로스라인을 수비수 둘을 뚫고 집어넣는 헤딩골. 2점 차로 뒤지고 있는 종료 3초 전 슈터가 하프라인에서 공을 던졌는데 포물선을 이루며 바로 림에 꽂히는 버저미터. 일분여 가까이 이어진 랠리 끝에 상대방 코트 모서리에 정확히 떨어지는 스파이크.


왜 우리 인생에는 제약이 있을까? 해결하지 못하는 숙제가 있을까? 감당 못할 조건들이 허들처럼 빽빽하게 눈 앞에 놓여 있을까? 우린 때로 그 모든 게 사라졌으면 하고 바란다. 아니, '때로'는 거짓말이다. 늘 바란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 심지어 나를 가로막을 상대조차 없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편하겠지. 아무 걱정도 조바심도 없겠지. 하지만 거기서 우린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과 화해하는 것에 관계된 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이렇게 썼다. 맞다.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는 육체를 가졌고, 그 육체로 인해 숙명적인 한계를 짊어지고 있다. 당장 벗어버리고 싶지만, 그럴수 없다. 우린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과 화해해야 하고, 그 한계투성이인 육체로 아름다움을 구현해야 한다.


난 그의 글에서 분투와 좌절을 본다. 동시에 아름다움을 본다. 그 자신도 인생이란 코트 위에서 끝없이 날아드는 공을 받아쳐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매번 이기진 못했을 것이다. 이미 마무리된 그의 삶을 보며 여러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그가 우울증이라는 술래에게 붙잡힌 그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꽤 멋진 생각과 이야기를 남겼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5.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라도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라면, 그런데 도무지 글이 쓰여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서점에 달려가 이 책을 펼치고 맨 마지막 수록작인 「재미의 본질」만 그 자리에서 펼쳐 읽기를 권한다. 단 8페이지 밖에 되지 않으니 몇 분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사진으로 그 앞 부분 세 페이지를 올려놓았으니 가는 길에 이걸 읽고 가도 될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덟 페이지의 글은 그야말로 '미쳤다'는 소리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게 바로 글을 쓰기로 작정한 당신이 앞으로 평생 짊어지고 갈 병이다.


앞선 여러 글에서 난 이 작가의 치열함에 혀를 내두르다가 이 글에 와서는 아예 항복을 외치고 말았다. 평생 앓고 지내던 병의 이름을 정확히 짚어내는 명의를 만난 기분이었다. 사실 그러나 안다. 이 병엔 답도 없고 약도 없다. 불치병이다. 지금도 방바닥을 기어다니던 저 '기형의 아이'가 비뚤어진 손을 휘둘러 내 발목을 움켜잡는다. 제발 이대로 자길 버리지 말라고, 당장 뭐라도 좀 해보라고.


그렇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도 '기형의 아이'들을 온 몸에 주렁주렁 매단채로, 집채만한 그림자를 드리운 우울증에 쫓기며 살아왔을 테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책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것이야말로 여러 제약에 시달렸던 그가 내 앞에 날린 강서브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다. 아름다움이다. 생각하고 곱씹을 수록 기가막힐 따름이다. 그래, 난 이것을 어떻게 리턴해야 하는가? 언젠가 나의 리턴도 기막힌 곡선을 그리며 상대의 코트를 꿰뚫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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