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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May 02. 2024

나는 주장한다, 고로 존재한다

안토니오 타부키「페레이라가 주장하다」

1. 꼭 소설 뿐만일까 싶지만 그래도 특히 소설은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슐러 K. 르귄은 「글쓰기의 항해술」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난 이 말을 아무리 곱씹어봐도 맞는 말이라 생각하고 있다.


서사문 문장의 기본적인 기능은 이야기를 흘러가게 하고 독자가 이야기와 함께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중략) 서사문 문장의 리듬이 너무 예측 불허거나, 너무 인상적인 정도로 아름답거나, 직유나 은유가 너무 눈부시게 빼어나면, 독자는 읽다가 말고 '우와, 와아!'라고 소리치게 되기까지 하지만, 이는 이야기에 제대로 기여할 수 없다.

어슐러 K. 르귄 「글쓰기의 항해술」 중에서


그렇게 따지면 이 책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의 문장은 계속 '페레이라는 주장한다'로 마무리된다. 첫 문장부터 그렇다. "어느 여름날 그를 만났다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뭐, 그럴 수 있지. 현재 페레이라가 과거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해야할 상황에 놓여있나보네.'


그러나 이후로도 '페레이라는 주장한다'는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마치 옛날 오락실 앞에 놓여있는 두더지게임을 보는 기분이다. 어느 순간 이후로 저 문장을 볼 때마다 망치로 내리찍어서 종이 밑으로 들여보내버리고 싶은 기분이 치밀어오른다. 아니면 시골길 과속방지턱을 넘는 기분이다. 대체 왜 과속방지턱이 10미터, 20미터마다 튀어나오는 건가. 게다가 이 과속방지턱은 왜 이리 뾰족하고 높은지 차 밑바닥을 다 긁어먹을 것만 같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이쯤되면 어느 순간 이후로는 작가가 아니라 번역가에게도 화가 나기 시작한다. 물론 원작을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으나, 이게 정말 필요하다고 믿었을까? 뭔가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없어도 충분하지 않나? 내가 너무 과민한 것 아니냐고? 그럴리가. 챕터 1이 꼴랑 5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 '주장한다'로 끝나는 문장이 17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싶을 따름이다.

2. 페레이라의 호칭은 '페레이라 박사'다. 자신도 타인도 그렇게 부른다. 그는 오랫동안 범죄기사를 다루던 기자였으나 지금은 얼마 전 창간 된 리스본의 지역신문 '리스보아'의 문화면을 담당하고 있다. 문화면 담당이라고 하니 대단해보이지만 실상 문화면은 그가 혼자 다 작성해야만 한다.


그는 몇 년 전 폐결핵으로 아내를 잃었다. 그는 카톨릭 신자이며 영혼을 믿었으나 육신의 부활은 믿지 못했다. 그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죽은 아내의 사진에 대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그립다.


그가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는 자신을 대신해서 '부고기사'를 써줄 기고자를 찾는 일이다. 문화면을 혼자 채워나가는 일은 쉽지가 않다. 특히 부고기사는 꽤나 까다롭다. 죽은 대상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다 훑어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부고기사를 쓸 수는 없다. 부고기사는 내용이 까다롭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미리 써두지 않으면 '기사'를 완성했을 때는 이미 기사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무척 지루한 이야기일 것 같다. 나이먹고 뚱뚱한 홀아비 기자의 홀로살이 라고 하면 그려지는 내용은 뻔하다.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나와서 연애를 하든, 불륜을 저지르든, 권태를 느끼고 일탈을 저지르든... 내 빈곤한 상상력은 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페레이라에 맞춰져있던 카메라 포커스는 갑자기 드론을 타고 날아올라 리스본이란 도시의 전경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바라보기에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잘 안 쉬어진다. 갑자기 너무 하늘 위로 올라가 공기가 희박해진 탓일까? 아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드리워진 그림자 탓이다.

3.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세계사에 관심이 있어도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꽤 유명세를 떨치는 데 비하면 살라자르는 유명세에 있어서만큼은 억울한(?)면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꽤 재미있는 이력의 소유자다. 일단 그는 독재자이지만 군인출신이 아니다. 무려 경제관료 출신이다. 경제관료가 권력을 쥐게 되면 뭔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는 포르투갈의 저개발 정책을 추진한다. 물론 이 정책이 옳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릴 수 있겠으나, 경제관료가 개발을 포기하고 심지어 국민을 우민愚民화 시키는 데 앞장 선 것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나 싶다.


살라자르의 독재가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온건한 형식을 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세상에 온건하고 평온한 독재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차라리 왕정이라면 모를까. 당장 우리가 겪은 전두환식의 독재가 군화발과 곤봉, 남영동 대공분실의 물고문과 삼청교육대의 목봉체조를 떠올리게 한다면, 살라자르의 독재은 마치 안개 같다. 분명한 상징물이 떠오르지 않는, 일종의 자연환경 같은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다루는 살라자르의 독재는 옛시절에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서 실제했던 사회상 하나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꽤 많은 부조리로도 대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소재가 된다.

4. 이야기는 꽤나 선명하다. 페레이라는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도 알고 있다. 지금 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분명 이상하다. 얼마나 이상한가. 경찰이 사회주의자 짐마차꾼을 죽였는데, 신문 1면에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요트가 뉴욕을 출발했다'란 기사가 실리고 죽은 짐마차꾼의 이야기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문이 아닌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물어나른다.


아무리 문화면 담당이라 한들 페레이라는 짐마차꾼이 죽었다는 사실을 애써 끝까지 모른체 한다. 심지어 그는 모든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거리의 카페 종업원에게 도리어 물어서 얻어듣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페레이라는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안락한 위치에 도달해 있다. 작은 지방지의 문화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게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자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독재권력은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말하지 마라, 외치지 마라, 모이지 말고 행동하지 마라. 시키는 일만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적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페레이라 정도면 충분하거나 넘치지는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안락함은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페레이라는 결국 주장한다. 이 이야기가 끝없이 페레이라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주장화' 시키는 것은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주장을 잃어버리면 그는 결국 인간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5. 이야기의 소재로 '부고 기사'가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꽤 많은 수의 유럽 작가들이 등장한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같은 느낌이다. 다뤄지는 작가들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훨씬 더 입체적인 감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 지식이 부족해서 거기까진 닿을 수 없었다.


페레이라는 편집장에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안토니우 페루, 페레이라는 생각했다, 그 끔찍한 안토니우 페루, 가장 나쁜 점은 그가 교활한 지식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친구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지만 페소아도 결국 그런 이상한 친구를 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안토니오 타부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중에서


정작 이 소설의 작가인 안토니오 타부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대학시절 '페르난두 페소아'를 접하면서 포르투갈어와 문학을 익혔고,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소설 안에서 페소아에 대한 평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도 꽤나 적나라한 평을 '부고 기사'를 통해 다룬다. 유럽 문학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훨씬 즐겁게 이 책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코 독특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이상하고 거슬리는 문장이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지만 다 읽고 나면 저 '페레이라가 주장한다'라는 문장에 위안을 받게되는 기묘한 소설이었다. 나는 오늘 내 모든 안락함과 편안함을 내려놓고라도 주장해야 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전히 난 '페레이라가 주장한다'의 쓰임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페레이라는 주장했고, 그렇게 분명한 한 명의 인간이 된다. 그렇다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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