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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May 09. 2024

우리가 이 책을 닫을 수 있는 그 날이 올까

조지 오웰「위건 부두로 가는 길」

1. 조지 오웰 하면 누구나 먼저 「1984」나 「동물농장」을 떠올릴테고, 그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소설들이 지닌 성취는 놀라운 것이어서 여전히 우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조지 오웰은 소설가보다는 르포 작가로 더 깊게 각인되어 있다. 앞서 말했던 두 권의 소설이 책장에 꽂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의 에세이인 「나는 왜 쓰는가」 나 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훨씬 좋다.


그의 에세이와 르포는 놀라우리만큼 삶에 밀접하게 붙어 있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몸을 이끌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곳을 뒹굴고,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직접 맛본다. 그리고 가감없이 종이 위에 그것을 펼쳐놓는다.


이야기가 조금만 옆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주길 바란다. 난 그런 의미에서 요즘 흔히 '철학'이니 '인생개론'이니 하는 외피를 뒤집어 쓴 채 남발되는 현학적인 말들을 볼 때마다  앞이 캄캄해진다.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은 책상머리 앞에 안전하게 묶어둔 채로 수많은 말들을 쏟아놓는다. 그 책의 저자들은 기껏해야 여행을 가듯, 나들이를 가듯 대상을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래놓고 남들의 삶은 어서 '옳은' 방향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떠민다. (물론 그 길로 나아가기 전에 자신에게 책값을 던져주고 가야만 한다.)


난 그런 행태에서 서정주나 이광수, 김활란 같은 치들이 미친개마냥 떠들어댔던 황국군 예찬이 겹쳐보인다. 일본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던 친일파들이 스스로 카미카제 비행기에 올라타 몸을 던졌다면, 난 그들을 증오할 필요가 있나 여겼을 테다. 지금도 이상한 신념에 자신의 생을 불태우는 이들은 부지기수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안락함과 윤택함을 지키기 위해 남들을 전장으로 내몬다. 난 '나라를 팔았다'는 말은 아예 없는 말이라 여긴다. 그들은 이 땅과 다른 이들을 팔았다. 나라는 돈이 안된다. 그러나 사람은 돈이 된다. 그들은 인간을 판 노예상이자 살인마요 인간백정이다.


물론 책 몇 권 판 일이 이렇게 매도되는 게 그들은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은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옳은 말을 이용해 사람을 벼랑으로 내모는 일이야 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악한 짓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들도 자신의 말이 삶에 뿌리내려있음을 증명해주기 바란다.

2. 다시 말하지만 조지 오웰은 자신이 대상 안으로 들어가 글을 쓴다. 그래서인가 종이에서 냄새가, 체온이, 맥박이 느껴질 정도다.


이 책에서 그는 직접 영국 북부 산업도시의 삶 자체를 체험하고 보여준다. 그렇게 했음에도 그는 자신이 그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정부분 비켜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필터를 씌우고 윤색과 보정을 거쳐 나온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그 안에 들어가 생의 구정물에 뿌리를 담그고 그대로 뽑아올린 진짜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챕터 2 '막장의 세계를 체험하다'를 읽고는 충격에 빠져서 한동안 멍하니 심호흡만 했던 기억이 있다. 평소 옮겨적기를 잘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챕터는 고스란히 워드에 옮겨보기도 했었다. 그때(물론 지금도) 가장 인상깊었던 한두 대목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진짜 놀라운 것은, 지하에서 수평으로 이동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나는 탄광에 들어가보기 전까지는 광부가 승강기에서 나와 탄맥을 따라 몇 미터만 가서 작업을 하면 되겠거니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런던 브리지에서 옥스퍼드 서커스까지의 거리는 되는 갱도를 기어야 하는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탄광의 수직 갱도가 탄층 가까운 어디쯤까지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 탄층을 파내고 나면 새로운 탄층을 따라가야 하고, 그럴수록 작업은 수직 갱도 밑바닥에서 점점 먼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수직 갱도 밑바닥에서 막장까지의 거리가 1.5킬로미터 정도라면 평균쯤일 것이고, 5킬로미터도 보통에 속하며, 8킬로미터나 되는 탄광도 여럿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지상에서의 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1.5킬로미터든 5킬로미터든,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주요 통로를 벗어나면 거의 없으며, 주요 통로라 해도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지금 나는 따뜻한 석탄 난로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사월이지만 나에겐 아직도 불이 필요하다. 2주에 한 번 집 문 앞까지 석탄 수레가 오면, 가죽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질긴 자루에 담은 타르 냄새 풍기는 석탄을 실내로 날라와 계단 밑에 있는 석탄 장고에 절거덕 소리를 내며 부려놓는다.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이 석탄과 멀리 있는 탄광에서의 노동을 결부시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것은 그냥 '석탄', 달리 말해 나에게 있어야 하는 무엇일 뿐이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딱히 어딘지는 모를 어딘가에서 도착하는 검은 물질이며, 지불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 빼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도 같다.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인 것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중에서

3. 마침 5월 1일 노동절이 있던 주간이어서 전태일 열사 관련된 영상을 유튜브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 영상을 보고서야 내가 전태일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놀라울만큼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내 머릿속 전태일은 '노동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청계천에서 분신을 했던 노동자' 가 전부였다.


그러나 전태일과 그 주변의 삶은 신기할 정도로 조지 오웰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층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가난은 어디서나 닮은 삶을 낳는 것일까? 당시 한국의 빈민 노동자들은 한 달 생계비의 5분의 1, 6분의 1이 채 될까 하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해야 했다.


공장에서는 물도 주지 않고 '국물'요리도 금지했는데, 이는 화장실 갈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미싱을 돌리는 평균연령 15세 여공들은 먼지로 인해 폐가 말그대로 '녹아나갔'어도 채 병원에 가지 못했는데, 무슨 병이든 전염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바로 해고를 당해서였다.


전태일의 가족 전체는 당시 많은 하층민처럼 수없이 모였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는데, 그들이 어떤 연락처나 약속을 나누지 않고도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이 노숙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염천교-용산-서울역으로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었다.

영상 중간 전태일이 '축조근로기준법해설서'를 해독하기 위해 2년 반이라는 시간을 들였다는 대목에서 나는 먹먹함이 목젖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당시 남성의 절반이 중학교도 못 나온 상태였단다. 그런데 근로기준법'해설'서가 한자로 범벅이 되어있다. 근로기준법 해설서이지만 법조인들 보라고 만든 책이지 노동자를 위한 책은 아니었다. 노동자가 자신이 무슨 법적 권리를 지녔는지 알기까지 한자를 해독하느라 2년 반이란 시간이 필요한 나라. 매일밤 극심한 육체노동 끝에 집으로 돌아와 해설서를 해독하며 전태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태일이 "내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어도..." 라고 했다는데,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린 대학이란 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싶어진다. 배운 것과 가진 재주를 모두 끌어모아 그저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 인간, 옆에 사람이 죽어나가든 말든, 어딘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든 말든, 내 집 값만 중요하고, 내 자동차 브랜드만 중요한 인간을 생산하는 대학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4. 난 얼마 전 시바타 료의 소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다루며 글에 묻어있는 오래된 냄새는 어찌 할 수 없다고 두둔했는데, 그건 소설 전체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나 태도가 마음에 꽤 들었기에 화자와 그 주변이 풍기는 가부장적인 곰팡이 냄새는 조금 참고 봐줄만 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다시 읽으니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어졌다. 좋은 건 좋다고 하고, 구린 건 구리다고 하는 게 맞았을 것 같다. 시바타 료의 소설은 1964년 작이었지만, 이 책은 무려 1937년 작이다.


허나 이 책은 놀라우리만큼 쨍하다. 살아있다. 군내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도리어 그 '새 것 냄새'가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왜? 이 책은 1930년대의 영국을 말하지만,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을 통해 새롭게 재현 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의 막장을 지나가는 누군가의 삶을 타고 다시 한번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캠페인 기간 동안에 어떤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먹으면 걸리고 죽을 것이면 몰라도 없는 사람은 아래도 선택 있게, 싸게 먹을 있게 해줘야 한다." 그는 이것을 '자유'라고 했다.


조지 오웰은 영국 하층민 노동자들이 건강에 나쁜 음식들을 찾아가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실업으로 인한 끝없는 비참함은 계속해서 고통 완화제를 필요로 하며, 그런 차원에서 차야 말로 영국인의 아편이다. 차 한 잔이나 아스피린 한 알이 통밀 식빵 한 조각보다는 훨씬 나은 일시적 흥분제가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중에서


그 시절 영국 하층민 노동자의 식료품 리스트에도 차 값은 들어가 있었다. 그걸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비난할 수도 있다. "배가 불렀나보네. 차를 다 사 마시고." 누군가 요즘 우리나라의 하층민들이 퇴근 길 손에 치킨 한 마리, 피자 한 판 사 들고 가는 것을 보고 "나라가 풍족해졌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조차 안되는 나라보다야 훨씬 나은 삶일 수 있다.


그러나 차 한 잔이 차 한 잔의 무게를 넘어 오늘의 삶을 놓지 않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애써 고통을 덮는 이불이 되어서도 안된다. 어느 삶에서는 분명 그렇게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옳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걸 옳다고 해버리면 인생의 모든 부조리가 사라진다. 치킨은 맛있지만 그저 치킨이어야 한다. 생일에 치킨 한 마리 먹는 걸 소원하는 아이에게 식은 치킨 하나 던져주는 걸로 끝내서는 안된다. 우린 아이에게 진짜 소원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

5.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앞부분은 작가가 직접 취재한 하층민의 실생활을 다룬 르포 중심이고, 뒷부분은 작가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신념을 서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 읽었을 땐 앞부분의 생동감에 비해 뒷부분은 조금 약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번엔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냄새를 다루는 단락에선 소름이 돋았다. 냄새는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영화 속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아들 기우(최우식)를 시작으로 동익(이선균)의 집에 기생을 시작한다. 그들은 각각 엘리트 대학생, 미술치료사, 수행기사, 입주가정부로 외향을 꾸민다.


하지만 냄새는 숨길 방도가 없다. 박사장의 아들 다송은 기택의 가족들에게 묘하게 같은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차린다. 최종국면에서 박사장은 기택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책에서 브루주아 계급인 조지 오웰은 자신도 '냄새'로 계급을 나누는 교육을 받았음을, 많은 순간 그 '냄새'를 못견뎌 했음을 고백한다. 난 인터뷰 기사를 다 찾아보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봉준호 감독이 냄새라는 키워드를 뽑아내는데 조지 오웰에게서 영향을 받은 건지까지는 알 도리가 다. 하지만 놀랍도록 비슷한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 비판의 대목도 눈에 꽤나 들어왔다. 무엇보다 스스로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대목은 진짜 신랄했다. (원래 아는 놈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자면 '진보주의자'가 될 텐데, 자칭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진보가 왜 일반 대중에게 호소력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정확한 진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보면 숨이 콱 막히는 건 "같은 질문이 오래 전 이미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1930년대 후반에 가졌던 답답함을 우리는 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것일?

심지어 1930년대 후반 유럽사회에 암운을 드리우던 파시즘의 그림자가 지금 이 순간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보면 조지 오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수많은 나라가 우경화의 비탈길에서 미끄러지고 있고, 기후위기라는 혜성이 거대한 몸을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어도 지도자라는 들이'돈룩업 Don't look up'을 외쳐대는 걸 보면 그는 차라리 막장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 극우 파시스트들의 유일한 대항마인 '진보주의자들' 조차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이미 다룬바 있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 교수는 진보주의자들이 스스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무신론적인 도그마에 빠져서 '정의'와 '옳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비판한다.


이 이야기는 1930년대에 이미 조지 오웰이 지적한 내용과 일치한다. 사회주의자, 즉 진보주의자들이 '물질적 유토피아'만을 제시하는데 급급하다보니 파시스트가 '올바른 우파' 포지션까지 흡수해버렸다는 거다. 링컨의 공화당이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어버렸다. 링컨의 유산이 트럼프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 이 상황은 모두의 비극이다. 진보주의자도 이 비극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6. 조지 오웰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대해서는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작가이지 예언자도, 인류가 만난 마지막 현자도 아니다. 1930년대의 질문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약간의 변주만 거치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반복재생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여전히 이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막장이 존재한다. 광부들의 얼굴에 공기중에 떠다니던 탄가루가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처럼 사회의 어두움을 얼굴과 몸에 새긴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업체 직원들 뿐 아니라 생의 끝자락에 몰려있는 자영업자들이 있고 더한 밑바닥을 버텨내기 위해 존재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지방은 소멸의 길로 걸어가고 있고 사회 전체는 자연스레 생의 문을 닫아가고 있다.


조지 오웰의 목소리는 유통기한이 끝도 없이 갱신되고 있다. 이 사회 자체가 그의 목소리가 썩어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책을 내가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갈갈이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리고 싶은 이유다. 우린 어느 시절에야 이 막장같이 깊고 깊은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 책을 닫을 그 날이 오긴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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