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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May 23. 2024

죽어있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자는 영원히 이방인일 뿐

「디에센셜: 알베르 카뮈」편, 「이방인」을 중심으로

1. 팬이 많은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 대상이 알베르 카뮈라면 그 당사자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반응을 보인다해도 시큰둥한 콧방귀 정도가 다이리라. 그러니 용기를 갖고 말해본다. 이 책을 읽고 확실히 알았다. '나는 카뮈를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일단 좋아한다고 말을 하기에 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서 난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거의 그의 세계 안으로 몇 발 들여놓지도 못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이 상태로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지구 반대편 남미 음식을 그냥 그림만 보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책을 읽으면서 카뮈에 대해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아졌다. 이제 막 문 손잡이 정도 찾아 잡은 느낌이다. 앞으로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카뮈라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될까? 그건 아직 모를 일이다. 여기에 일단 내가 잡은 문 손잡이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물론 이 글을  카뮈의 팬 중에서 "어, 그거 문 손잡이 아니라 그냥 벽돌 튀어나온 건데." 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 실력이 고작 요 정도다. 부디 아량을 바란다.

2.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첫 문장부터 유명하다. 정확히는 그 문단 자체가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걸로는 독보적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중에서


주인공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었다. 독자는 주인공의 반응을 예측해볼 수 있다. 온 몸의 물을 다 끌어온 것처럼 눈물을 터뜨리든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장례식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후회를 하든지, 술을 퍼마시든지 괜히 화를 내거나 물건을 때려 부술 수도 있다. 아니면 깊은 무기력에 빠져 미친듯 잠만 잘 수도 있다.


독자는 왜 이런 반응을 예측하는가? 그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그는 전보에 담긴 정보의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한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정확히 '언제' 벌어진 게 대체 무엇이 중요한가? 그의 반응을 보며 독자는 이상함과 더불어 본능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도 거부한다. 장례식장에서는 계속 졸려하고, 태연히 관리인이 타주는 밀크커피를 마시고, 심지어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살고 있는 도시가 보이자 이제 익숙한 잠자리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다 싶어 기쁨을 느낀다.

그것 뿐인가?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그는 해수욕을 나간다. 거기서 마리라는 여자를 만나 관능적인 데이트를 한다. 둘은 그날 영화를 보고 잠자리까지 갖는다.


이쯤되면 우린 주인공 뫼르소의 행태에 대해 해석하기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어야 거길 시작으로 해석이라는 걸 해볼 수 있지 않겠나. 그저 미간이 찌푸러지면서 자연스레 '이 새끼 사이코패스 아닌가?' 싶은 생각만 든다.


이야기는 흘러 1부 마지막으로 가면 주인공이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 긴 하나의 문단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 주인공이 아랍인을 죽일 현실적인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그 아랍인이 친구인 레몽의 팔을 칼로 그었다 해도 정작 주인공 뫼르소와 레몽은 그다지 끈끈한 사이도 아니다.

이야기의 포인트 몇 개만 거칠게 뒤바꿔서 그 살인 장면을 더 불편하게 만들어볼까?


소설은 그 배경을 '알제'라는 도시로 하고 있다. 알제는 북아프리카의 도시로 알제리의 수도다.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를 '알제리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완벽한 프랑스인이고 프랑스 작가다. 왜? 그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령이었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알제리에 살고 있었으니까. (특히 도시는 더 그 비중이 높았다고 한다.) 카뮈는 사는 동안 프랑스가 아닌 알제리를 본 적이 없다.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있어 알제리는 프랑스의 일부였다.


배경설명만 듣고도 내가 사건 장면을 어떻게 바꿀지 대충 감을 잡으신 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 조선인과 일본인이 여자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 조선인이 먼저 일본인의 팔을 칼로 벴다. 그러자 그 일본인의 지인인 다른 일본인이 총으로 조선인을 쏘아 죽였다. 이미 죽은 조선인의 몸에 확인 사살 네 방을 더 하면서.

소설의 2부에는 뫼르소에게 어떻게든 사형을 판결하고자 하는 검사의 이상한 논리를 보게 되는데, 내가 이 사건을 맡는 검사라고 생각하면 뫼르소야 말로 살려두면 나중엔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가 되지 말란 법이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뫼르소의 행태는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간적인 맥락이 결여되어 있다. 모든 행동이 순간적인 충동으로만 단락지어져 있고, 순간의 쾌락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알제리는 사실 알제리라는 독립된 국가 개념 자체가 없는 지역이었으니 우리와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아까 내가 바꾼 장면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하자면 일본인 검사가 조선인을 죽인 일본인 살인자의 잔혹함에 경악해서 무조건 사형을 달라고 하는 거고 일본인 배심원단이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다. 이상하게도 엄청나게 정의로운 결과처럼 느껴지지 않나?

3. 그래서 이 「이방인」은 도통 쉽게 소화가 안된다. 대체 카뮈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간에, 일종의 묻지마 살인이나 혐오 범죄의 그릇에다 어떤 메시지를 담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무리 맛있는 최상등급의 스테이크라 한들 씻지도 않은 개밥그릇에다 담아주면 그걸 먹을 수가 있을까? 카뮈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가 뼛속 깊은 혐오주의자에 본인이 사이코패스라서 이런 글을 있었던 것일까? 다 아니라면 그는 왜 이럤을까?


사실 전에도 난 몇 번이고 이 「이방인」을 읽으며 같은 고민을 했다. '이야기의 외피 자체가 왜 이리 불편하고 비위를 거스르게 만들어져 있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이 소설을 보면서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번만큼은 매 장면마다 드러나는 뫼르소의 시각이 무척 좁지만 깊게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느낌이냐면 나도 장례식장에서 주인공이 마신 밀크커피의 맛이 궁금해졌을 정도였다. 지중해는 금빛 윤슬을 자랑하며 반짝거린다. 매혹적이고 탄탄한 마리의 허벅지에서 막 마른 바다의 맑은 짠내가 슬며시 올라온다. 그리고 살인장면에서 주인공의 미간을 찌르는 햇살은 이야기의 모든 것을 꿰뚫고 심지어 책장을 뚫고 올라올 정도로 타올라 내 눈마저 어지럽힌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이야기가 씻지도 않은 개밥그릇에 담아놓은 최상등급 스테이크라는 사실이 변하는가? 아니다. 그런데 이 스테이크를 음식물로 받아들이느냐 설치미술작품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는 완벽하게 변신한다. 쓰인 재료는 음식물이지만,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서 미술작품처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진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견한 내용은 '맥락에 묻혀가는 순간들의 소중함'이었다.


인간은 역사에 편입되는 존재다. 그렇기에 사회는 우리에게 이미 만들어진 맥락에 맞는 행동을 요구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는 슬퍼해야 하고, 이후로도 한동안은 애도의 기간을 가져야 한다. 공기관에 증언을 할 때는 사실에 입각해야 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고, 죽였다면 괴로워하며 반성을 해야 하고, 사형을 앞두고서는 신 앞에 참회를 해야 한다.

그럼 카뮈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 개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맥락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렇게 읽지 않았고, 카뮈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혹여 그게 카뮈의 진짜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난 기꺼이 그를 비웃어줄테다.


인생의 모든 맥락을 무조건 배제하는 건 아랫도리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길에 나서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건 중2병에 걸린 아이들조차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만한 생각이다. (노팬츠룩도 팬티는 입지 않던가.)


역사의 맥락은 개개인을 사회에 맞는 일부로 만드는 데 일차적으로 복무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역사의 맥락은 개인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의 빛남을 더 드러내는 배경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맥락은 한 개인을 무척 기계적이고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앞서 난 어머니의 죽음이란 사건으로 인해 예상되는 다섯 가지의 행태를 말했다. 눈물, 후회, 폭음, 폭력, 무기력.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중에서도 그나마 일반적인 건 '눈물'이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나라는 상주가 너무 울면 또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친척이 꼭 나타난다. 마음껏 울지도 못하게 한다. 어쩌라는 말인가?


난 카뮈가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만날 때는 반항해야 한다."고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반항'을 위하여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매순간 삶의 활기와 아름다움을 찾아야만 하고, 반짝거리는 일들에 내 마음을 쏟을 줄 알아야 한다고 카뮈는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4. 그래서일까? 난 이번에 「이방인」의 여러 묘사들을 보면서 속으로 몇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이렇게까지 화면의 포커스를 끌어당긴다고?"


예전에 읽었을 땐 이야기의 흐름과는 상관이 없지 싶어서 휙휙 지나쳤던 것 같은데 이번만큼은 이상하게도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묘사 실력 뛰어나단다."가 아니고, "삶의 매 순간을 이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맥락에 휩쓸리지 않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단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카뮈는 무신론자니까 이런 예시를 좋아하지 않을게 뻔하지만, 난 유신론자이면서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니까 내맘대로 예시를 하나 들어오겠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하시던 시절에 가장 싫어하셨고, 대놓고 "너희들은 저러지 말아라" 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집단이 당대의 지식인이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쪼개고 쪼개서 별 희한한 조항들(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쉬어야 하니까 개인이 몇 발자국까지 걸을 수 있는가?'같은)을 만들어서 그걸 다 지키면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런 바리새인의 행태를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어느 날 엄마가 장을 보러 나가면서 아들에게 TV 좀 그만 보라고 말했다. 돌아와보니 아들이 TV는 안보는데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엄마가 TV를 보지 말라고 하면 만화책을 봐야 하는가, 공부를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며 '그거 하지마'라고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답게 잘 살아보라고 하신 거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인간답게 사는데는 관심이 없다. 그냥 하지 말라는 것만 안하면 되는 줄 아는 거다.


돌아와서 역사와 사회의 맥락이라는 건 왜 존재하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그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맥락에도 본연의 목적이 있다. 인간은 이 역사적 맥락이라는 배경 안에서만 가장 인간답고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역사와 사회의 맥락이 가진 물결은 도도하고 거대해서 개개인을 너무 쉽게 집어삼킨다.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이 맥락이, 인간들 위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개개인의 인간 자신도 그 맥락에 복종하는 걸 무척 편안하게 생각한다. 왜?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매 순간 눈을 부릅뜨고 삶의 장면마다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은 피곤한 일이니까.

5. 그것이 어떤 무엇에 근원하든지 인간이 스스로 눈뜨고자 하는 의지를 그만두게 하는 일이라면, 그 인간을 죽이는 일이다.


카뮈는 '희망' '신' 같은 말들이 인간의 눈을 가린다고 보기에 다 버리라고 한다. 물론 난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이란 말과 '신'의 존재를, 카뮈가 생각한대로 눈 뜨기 싫고 생각하기 싫어서 쓰는 이들이 많다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희망'의 용법이 아니고, '신'의 바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난 빛나는 순간의 총합으로 실존이 맞닥뜨리게 되는 궁극적인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구심이 있다. 그래서 카뮈가 바라보는 그 시각의 방향에는 결론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 아마 영영 그 방향으로는 난 발을 내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닥을 고르고 렌즈를 닦고 숨을 가다듬고 망원경에 눈을 대 삶의 순간순간을 바라보는 태도만큼은 언제나 내가 닮고 싶고, 배우고 싶어할 것임을 인정한다. 그는 죽은 사람이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이 없을 테고, 대신 난 그를 미워할 생각이 없다. 우리가 친해지게 될지는 시간만이 알고 있을 테다.


생명을 위협하는 끔찍한 대적은 죽음이나 고통도 아니며, 우리가 사회 제도와 개인적 책략을 동원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쓰는 어떤 유의 재난도 아니다. 그 끔찍한 위협은 죽음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필연으로 다가오기 전에, 즉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전에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진짜 공포는 바로 그와 같은 때 이른 죽음에 있는데, 이는 그 죽음 이후에도 상당한 세월 동안 생명이 계속되는 그런 죽음이다.

비테슬라브 가르다브스키 (유진 피터슨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중에서 재인용)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때 이른 죽음'으로 가득한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을 위해 주어진 많은 여건들이 도리어 우리를 짓눌러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서 스펙을 쌓아야 해. 어서 집을 마련해야 해. 어서 가정을 꾸려야 해. 어서 아이를 낳아야 해... 하나 하나 다 나쁜 일은 아니고 모두 다 좋은 말들 같은데 이상하게 이 흐름은 우리를 자꾸 벼랑으로만 내몬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캄캄함과 무미건조함으로 침몰해가는 삶을 매 순간마다 생각의 뭍 위로 끌어 올려야만 한다. 그리고 빛나는 오늘을 찾아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린 영영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


떠돌이 집시가 인적드문 공터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삶의 고단함을 춤과 노래로 달랬던 것처럼 우리, 같은 이방인끼리 그렇게 가끔 서로를 달래보면 어떨까. 그 공터 곁에 우리와 함께 귀뚜라미가 울고 하늘에는 휘황하게 빛나고 있을 달을 그려본다. 그래도 생각보다 꽤 아름다운 풍경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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