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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Apr 12. 2024

그래도 우린 이 공허 속을 헤엄쳐 가야만 해

시바타 쇼「그래도 우리의 나날」

1.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낯섦이 눈 안에 스며들 때가 있고, 반대로 그 낯섦 때문에 이야기에서 튕겨져 나갈 때가 있다. 이 소설에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처녀성 운운하는 소리는 절로 미간을 찌푸러들게 만들었다. 다 읽고 난 후 이게 대체 언제 나온 소설인가 하고 찾아봤다. 아니나다를까 1964년 작이란다.


1964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가 일본과의 수교를 시도했고, 베트남에서는 통킹만 사건이 터졌다. 마이클잭슨이 '잭슨 파이브'로 데뷔한 것도 1964년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는 이제 연식이 조금 차올랐다 싶은 내게도 꽤 낯설다. 1964년을 생각하는 방식은 1864년이나 1064년을 생각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감각적으로 무언가를 유추한다기보다 배워 아는 지식을 의식적으로 재조립해서 그 시절을 구축해야 한다.


1964년에 쓰여진 소설이니만큼 다뤄지는 시기는 그보다 더 이전일 테다. 처음 접한다면 그 점은 미리 알아두는 게 좋겠다 싶다. 난 그 사실을 몰랐기에 몇번이고 몸이 주춤거리며 제알아서 뒤로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것에는 어쩔수 없는 군내가 남는다. 그건 나중 사람이 알아서 걷어낼 몫이다.

2. 내가 기억하는 기묘한 풍경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의 일이다.


전화가 왔다. 그때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무슨 일인지 꽤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가족들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는데, 엄마는 놀라지 말라는 말부터 꺼냈다. 한 살 위였던 당시 교회 고등부 학생회 회장 형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형은 친구와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가 강에서 사고를 당했다. 장마가 막 끝난 여름, 날은 본격적인 무더위로 치달았다. 땡볕 아래를 달리느라 몸이 달궈진 두 고등학생은 잠깐 몸을 식히러 물에 들어갔다. 깊은 강이 아니었으나 중간에 모래 채취를 해서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자리가 있었다. 문제는 주의 표지판이 장마기간 집중호우로 인해 떠내려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자리는 물이 안으로 소용돌이치며 내려간다 한다.


학생회는 연락망을 통해 비보를 알렸고 다음날 우린 교회에 모여 버스로 장례식장에 갔다.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은 빨리 털어버려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장례는 이틀만 치뤄졌다. 그 날이 발인이었다. 새벽부터 모인 삼십여 명의 학생들은 소수를 빼놓고 너나 할 것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수 중 내가 있었다. 난 눈물이 나질 않았다. 장례식장은 충청북도, 장지는 전라북도였다. 우린 장지까지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도착했을 때 넓은 호남평아엔 어둠이 가득 내려앉아있었다.


기묘한 일은 교회돌아오는 차 안에서 벌어졌다. 아이들은 언제 울었느냐는 듯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는 점점 수위를 높였다. 수련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이상하게 선생님들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책임자였던 내 아버지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아이들을 말려야 하지 않느냐 하니 지나가듯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너무 오래 끌어안는 것도 안좋다고 하셨을 뿐이다.


그때 느낀 기묘함은 차에서 장난을 치는 아이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난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으면서 왜 엄숙함을 간직하고 싶어했는가?그 오래된 의문이 이 책의 서장을 읽으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혹시 난 그때 그 형의 죽음을 '인생의 중대사가 걸려있다는 흥분에서 오는 의식하지 않는 쾌활함'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에 알고 지내던 형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리 생각하면 나란 인간은 얼마나 기괴한 동물인가? 그리고 그걸 저리 적나라하게 '까발릴 수' 있다는 건, 작가도 그런 역설적인 '쾌활'함을 느껴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3. 혼돈의 시기에는 누구나 답을 찾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분투한다. 전후 일본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반공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던 시절에 미국의 그늘 아래 들어가 있었으니 분단이 되어버린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었겠으나, 그들도 나름 꽤나 시끌시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야기는 우연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헌책방에서 H라는 작가의 전집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꼭 필요하지 않는 그 책을, 평소라면 비싸서 사고 싶은 마음이 안들었던 그 책을 기이하게도 사들인다. 책엔 원주인의 장서인印이 찍혀 있었고, 우연인지 주인공의 약혼녀는 그 장서인의 주인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약혼녀는 주인공에게 그 장서인의 주인이자 전집의 전 주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과 약혼녀인 세쓰코는 먼 친척 사이로 타는 듯한 열정으로 약혼을 결정한 사이는 아니다. 둘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념으로 결혼을 결정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장서인의 주인인 사노를 찾는 과정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고, 천천히 자신이 숨겨왔던 과거와 그 내면의 허무와 마주하게 된다.

4. 좋은 소설이란 모든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달려가는 소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독이 될 수도 있다. 문장이 섬처럼 따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강렬한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을 찌르면서도 동시에 그 문장이 이야기를 위해 충실히 복무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서장에 제시되는 '쾌활함'에 대한 잔혹한 문장과 중반에 제시되는 '허무함'에 관한 질문도 이야기의 기둥이 되어 충실하게 사용된다.


"죽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이런 강렬한 질문은 아무리 떨쳐내고 싶어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버린다. 죽음 앞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문득 난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생각해봤다.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죽기 직전이면 내 핸드폰을 누군가가 없애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거라 하는데, 나도 그럴까? 살아오면서 해놓은 것도 없고 벌려놓은 일도 없어서 미련도 없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정말 죽기 직전에 떠올릴 어떤 장면이 하나도 없다면,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그게 과연 삶이기는 한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여러나라에 번역되어 나갈 때 제목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넘어올 때는 문학사상사에서 제목을 '상실의 시대'라고 지었다. 난 개인적으로 그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그 제목 덕분에 책이 많이 팔렸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이 소설의 제목을 바꿔보라고 한다면 난 '공허의 시대'라고 할 것 같다. 약간은 상실의 시대의 인기에 업혀가고자 하는 욕심도 담겨있음을 고백한다. 의외로 소설의 소재와 느낌도 비슷하다. 분투하다 무너지거나 미리 후퇴한 채 육체적인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는 젊음의 군상이 나타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나 결국엔 그 시절을 지나가야 하는 이유를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상대에게서 찾아낸다는 점도 그렇다. 이 소설이 20여년이나 앞서 나왔으니 직간접적으로나마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지만, 난 문학전공이 아니니 지식이 없는 느낌일 뿐 정확한 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워낙 강렬하게 시작을 해서 그랬는지 난 결론으로 다가갈수록 결국 이야기가 공허 아래로 영영 침몰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이야기는 적당한 합의도 강렬한 침몰도 아닌, 모든 것을 내던진 공허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가 어쩔 수 없는 그 시절의 구태의연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5. 우리는 모두 공허 속에 던져져 있다. 마치 물 속에서 사는 고래 같다.


고래는 포유류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숨구멍을 내밀어야 한다. 어류마냥 물 속에 녹아있는 산소를 걸러내는 아가미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근본적인 대책을 갖춘 방식으로 진화하지는 못한 셈이다.


하지만 고래는 물 속에 살기 때문에 지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동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물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고래는 자신의 거대한 몸집을 버텨내는 도구로 이용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해결하지 못한 공허 속에서 삶을 이어나간다. 차갑고 엄혹해서 이 공허함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에 침몰한다. 아니면 대부분 공허를 등에 짊어진 채 모른 척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만 급급하다.

문득 높은 빌딩에 올라가 밖을 바라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죽음의 세계가 얇은 창문 밖에까지 가득 차올라있다는 기묘한 느낌.


어렵지 않다. 가지 동작만 수행하면 괴로운 생명과 영원히 이별할 있다. 그러나 순간 생명은 억척스럽게 날 발걸음 뒤로 밀어낸다. 몸에 소름이 돋고 창문에서 돌아서서 삶을 이어나가라고 재촉한다. 낮고 어두운 방으로 돌아와 다시 고민한다. 돌아서서 다시 공허한 곳으로 내려왔는가.


하지만 이 필연적인 공허함을 견디고 이 공허에 제대로 된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가지고 있던 삶의 무게를 견뎌 낼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6. 이야기 속 약혼녀 세쓰코는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 앞서 편지를 남긴 모든 이들이 침몰을 선택했기에 그녀의 편지가 시작된 순간부터 '제발 그러지 마라'는 마음이었다. 세쓰코는 깊이 깊이 공허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그녀는 잠수했을 뿐 침몰하지 않는다. 공허의 길은 깊은 곳에 있기에 그리 내려갔을 뿐이다.


고래는 물 속에서 대략 한 시간 정도 잠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물 밖으로 나와 숨구멍을 통해 긴 물보라를 내뿜으며 호흡을 한다. 햇살이 잘 내리비추는 날에는 그 물방울들에 무지개가 피어오르기도 할 것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들은 고래가 숨을 내뿜는 모습을 보고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내뱉지만, 정작 우리가 감탄해야 할 것은 공허에 가라앉았던 인간이 희망의 경계에 올라와 숨을 내뱉을 때인지도 모른다. 세쓰코가 주인공에게 남긴 편지는 깊은 공허의 어둠을 지나 작은 무지개 한 줄기로 마무리된다.


머잖아 우리가 정말로 늙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어땠냐고. 그때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우리 때에도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어려움이긴 하겠지만,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려움에 익숙해지며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 중에도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로 용감하게 진출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젊은이 중 누구든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지금 우리도 그런 용기를 갖자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간 우리의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중에서


그렇다. 우린 결국 사는동안 이 공허의 바다 속을 계속 지나가야만 한다. 이 여정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 이 삶이 어떤 의미와 이야기로 남겨질지 우린 끝내 알 수 없을 테다. 공허의 바다에 던져졌다는 사실이 괴로울지라도, 이것을 끝까지 견뎌내는 것만이 우리의 몫이다.


때로 영영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질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지구의 모든 물이 날 짓누른 것만 같은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마음에 뚫린 구멍으로 까만 물이 속절없이 들이치는 것 같은 날도 있을 테다.


하지만 미리 침몰하진 말자. 깊고 깊은 그 곳에서도 아직 한 줄기 호흡이 남아 있다면 다시 어떻게든 희망의 경계까지 헤엄쳐 올라오기로 하자. 우리의 가쁜 숨이 무지개가 되어 피어오를 그 날이 분명 허락되어 있을 것을 믿는다. 그 날까지 우주의 소리를 닮은 고래의 울음소리로 서로를 끝없이 부르며 공허를 헤엄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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