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2024 시즌리뷰의 첫발을 뗐는데 어쩌다보니 특별판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은 정말 자의를 벗어나 어쩔 수 없이 쓸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 주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써보고 싶은 이야기였으나, 이런 방식일 줄은 정말 몰랐다. 예상치 못하게 자판을 두드리게 만드는 사건이 부디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야구 판에는 이런 말이 돈다. 감독 연봉의 반 이상이 '욕 먹는 값'이라고. 정확한 수치를 뽑아낼 근거는 부족하지만 한 시즌을 치르며 감독이 팀에 안겨줄 수 있는 승수를 약 3에서 4승 정도로 보는 건 이제 많은 팬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수치로 보인다. 많이 알려져있는 세이버매트릭스 수치인 'WAR :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수치 1이 대체선수 대비 1승을 더 가져다 준다는 뜻이니만큼, 감독의 WAR은 3~4 사이를 오가는 셈이다. 올 시즌 MVP를 탄 기아의 김도영이 기록한 WAR 수치가 8.32이란 점을 생각하면 연봉 1억을 받는 김도영은 감독 두 사람 몫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건 기아의 일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팀에는 감독보다 더 잘난 선수가 한둘 이상이 있기 마련이다.
잘생겼다! 이범호!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다. 야구에 있어서 감독의 역할이 한정적이라는 걸 어느정도 야구를 접해 본 팬이라면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팬들은 감독 욕을 한다. 고해성사부터 하자면 나도 올 시즌 중반 이범호 감독 욕을 했다. 특히 두산전 6:30 대참사가 벌어진 날에는 그 밤을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팀이 무너지면 어떡하나 부터 시작해서 이대로면 1년도 안되어 감독이 바뀌어야 하는 건가, 역시 선동렬 같은 베테랑 감독이 필요했나, 대체 구단주는 뭐하고 있는 건가 까지. 1위를 찍고 있는 중인데도 이랬다.
야구 감독은 모두 동성동본이다. 돌범호, 돌진만, 돌경엽, 돌승엽... 한 시즌을 치르면서 '돌' 씨로 성이 갈리는 능욕을 당하지 않는 감독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당연히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고 있는 팬보다는 현장에서 선수들과 부대끼고 있는 감독이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나 싶겠지만, 팬들의 성토를 듣고 있다보면 은근히 합리적이고 귀기울일 내용도 많다. 그런데 이 '성토'는 다시 처음의 질문과 부딪힌다. 야구란 스포츠는 감독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다. 현대야구는 더더욱 그렇다. 결국 선수가 못해서 들어야 할 욕을 감독이 대신 먹고 있는 중 아닐까? 감독은 왜 욕을 먹을까?
2023시즌 기아타이거즈는 73승 69패 2무승부, 승률 0.514로 6위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이 시즌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몇가지 보인다. 첫째는 외국인투수의 부진이다. 두번째는 중심타자인 나성범을 비롯한 선수들의 줄부상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팬들은 김종국 감독의 선수기용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하기 전 일명 '장뽀지' 사건이 터지며 장정석 단장이 물러나는 등, 구단 내외부가 시끌시끌했었다.
2024시즌 기아타이거즈도 23 타이거즈와 놀랍도록 비슷하게 출발했다. 이번엔 김종국 감독이 금품 관련된 스캔들이 터지며 낙마했고, 스프링캠프 도중 이범호 감독이 선임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기아는 87승 55패 2무승부로 승률 0.613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후 통합우승에 달성하기에 이른다. 전년도와 비슷한 출발이었는데 결과가 왜 달랐을까?
이런 계산이 꼭 정답은 아니겠으나 몇 가지 변수와 관련된 WAR 수치를 비교해서 대략적인 흐름을 유추해보자.
23시즌 기아의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외국인 투수였다. 앤더슨과 메디나로 출발한 시즌이 파노니와 산체스로 끝났다. 팀의 중심축이 되어줘야 했을 외국인 선발이 부진하자 치고 나가야 하는 타이밍에도 번번히 발목을 잡히는 모습을 보여줬던 게 23기아였다. 그에 비하면 24기아는 네일이라는 확실한 에이스를 확보했지만, 1선발을 기대하고 영입했던 크로우가 부상으로 중도이탈했고 네일마저 시즌 막판 불의의 사고로 턱 수술을 받게 되면서 대체 외국인이 계속 오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전 시즌보단 괜찮았어도 확실히 나아진 모습은 아니었다.
김도영은 시즌이 끝나자 예상대로 시상식의 트로피를 쓸어담고 있다. 2024시즌은 김도영의 시즌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보니 김도영이 '갑자기 대폭발'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완벽하게 맞는 말은 아니다. 기아팬들 중에도 김도영이 24시즌에 이 정도로 잘해주리라 예상한 이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김도영은 23시즌에도 제 몫을 다 해줬다. 부상으로 시즌 초반을 결장한 상황에서도 103안타 7홈런 25도루 타율 0.303, OPS 0.824를 기록했다. 38홈런 40도루를 기록할 줄 몰랐을 뿐, 풀 시즌을 소화한 김도영이 두 자릿수 홈런에 30개 이상의 도루를 하리라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23시즌 나성범은 부상으로 시즌 초반을 김도영과 함께 재활군에서 보내다 복귀한 후 그야말로 미친듯한 활약을 보여줬다. 걸리면 넘어갔고, 우리 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무섭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게 바로 '나스타'구나 했다. 문제는 시즌 후반 다시 부상을 당해버렸다는 점이었다. 23시즌 고작 222타수를 소화한 나성범은 홈런 18개, 타율 0.365, OPS 1.098을 기록, 이 페이스로 풀타임을 소화했다면 시즌 MVP가 당연한 비율스탯을 보여줬다. (24김도영의 OPS가 1.067이다.) 24시즌에도 나성범은 초반 결장을 하다 복귀했지만, 23시즌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시즌을 치렀다. 양쪽 허벅지를 번갈아가며 다친 게 부담이 된 건지, ABS에 적응이 잘 안된 건지 출장횟수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토막난 WAR수치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 주장, 올 시즌 잘해줬어
물론 여기서 더 고려해봐야 할 변수들이 있겠으나 23시즌과 24시즌 기아타이거즈를 비교해보면 전체 WAR수치가 6.27이 늘어난만큼 이 세가지 변수가 전체 WAR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두 시즌의 승수 차이는 14승이다. 이제 여기에서 감독교체라는 변수를 계산해보자. 당연히 정확하고 뾰족한 숫자를 얻어낼 방법은 없다. 이범호 감독이 한 시즌에 7승을 벌어다 줄 수 있는 명장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감독이든 한 시즌에 벌어들일 수 있는 승수는 정말 많아야 3, 4승 뿐이다. 그럼 대체 감독교체의 가치는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WAR이라는 수치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WAR이란 수치는 0이 기준일 뿐 최저점이 아니다. 즉, 마이너스 수치가 나올 수 있다. 많은 야구팬들이 감독을 욕하는 건 감독이 팀에 보탬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독이 팀을 깎아먹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보면 너무나도 자명한 문제들이 감독 본인의 자리보전욕심이나 ,'명장' 혹은 '누구누구 감독식 야구' 소리를 듣고자 하는 명예욕 때문에 개선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잘해봐야 일년에 3승 혹은 4승을 얻어낼 수 있는 자리에 앉았으면서 정신을 차리고보면 어느새 10패는 우습게 깎아먹고 있다.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금지어가 될 줄은 정말 몰랐었네(1)
경기 흐름과 상관이 없는 작전을 내고, 점수 차이와 상관없이 컨디션이 좋은 필승조를 쓰고, 왼손타자 앞에서는 상대전적도 안본채 무조건 왼손투수를 붙이고, 이상한 대주자를 계속 내서 경기 후반 역전 찬스가 와도 아까 쓴 대주자가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 누가봐도 바꿔줘야 할 때는 선수를 믿는다는 핑계로 내버려두고, 2군에서 올라와 기회를 받아야 하는 선수는 보여준 게 없다는 이유로(모두가 경력직만 찾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냐) 한두 타석 이후 다시 벤치만 데운다. 그래놓고 되도않는 인터뷰와 군기잡기로 선수단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심지어 독지가가 준 선수격려금을 제 호주머니에만 집어넣는 경우도 나왔다.
"아니, 왜 저러는 거야?" 소리가 절로 나오다보니 야구팬들은 야구를 보면서 도통 행복할 수가 없다. '돌땡땡 나가!' 소리를 질러본들 이미 져버린 경기를 뒤집을 수는 없고, 진짜 그 감독이 나가게 된다 해도 망쳐버린 시즌은 도로 물러주질 않는다.
(기억에 의존에서 쓰는 말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투수를 두고 '0을 지키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빌려와서 쓰자면 야구 감독은 '마이너스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는 역할'이라고 하겠다. 24시즌이 시작하기 전 이순철 해설은 기아타이거즈를 우승후보로 꼽으면서 '새로 오는 감독이 누구든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팀'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풀어서 생각해보면 감독이야 말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자리란 뜻이 된다. 그 자리에만 앉으면 다들 왜 그리 뭘 하려고 드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서 감독을 뽑는 게 차라리 나았겠다
맞다. 야구를 좋아하기 전에는 팬들이 너무 극성아닌가 싶다가 팬이 되고 나면 누구보다 먼저 감독 욕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팬이 되고 나면 종종 나도 모르게 감독 자리에 차라리 돌멩이를 앉혀두는 게 낫다 싶은 마음이 들고, 우리 감독 오늘은 퇴장 안당하나 싶어지기도 한다. 이러니 팬들이 감독의 성을 '돌'씨로 바꿔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헌법이 유린당한 내란의 순간
난 이 글을 2024년 12월 4일에 쓰고 있다. 어젯밤엔 이 대한민국의 감독이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 아니다. 실책이라면 좋겠는데 이건 헌법유린, 실정법위반의 명백한 범죄였다. 아, 차라리 돌을 앉혀두는 게 백만번 나았겠다 싶은 밤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국회의원들이 체포를 각오하고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고, 기자들과 시민들이 몰려나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상황을 지켜보았고, 대다수 군인들이 마지막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줬다. 이 모든 선수들에게 감사한다. 야구가 끝나고 이런 감정은 내년에나 느낄 줄 알았는데 또 이꼴을 당한다. 밤을 꼴딱 샜더니만 정신이 없는 하루다. 누가 잘하랬나, 잘못만 안해도 되는 것을.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금지어가 될 줄은 정말 몰랐었네(2)
야구는 인생을 닮았지만, 야구는 인생보다 너그러워서 야구는 세 번의 기회를 준다. 반면 인생은 실전이라 단 한 번에도 아웃이 된다. 맞다. 넌 아웃이다.